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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24일 일요일

여론과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Habermas)

2008년 말에 있었던 몇몇 흥미로운 여론조사의 결과를 통하여 하버마스의 여론론을 공부해본다('2008년'에서 보듯이, 지난 글을 옮겨옴). 지난 여론조사는 병역의무 대체복무제에 관한 좀 파장이 큰 이슈가 하나고, 다른 하나는 10만원권 지폐 발행에 관한 것이다. 구체적 내용을 따지고 평가하기 전에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으니, 첫째는 대립되는 찬반 의견의 주축에 세대별로는 30대가 좀 다른 면모를 보였다는 것이고, 둘째는 소위 '여론 주도층'과 국민 일반이 대하는 대체복무제에 대한 의견이 극도로(!) 상반된 상태라는 것이다(물론 여론조사 자체에 꼼수가 끼어들지 않고 정정당당했다는 전제 하에). 둘 다가 바야흐로 21세기적 인터넷 문명의 결과가 아니겠는가 싶기도 하지만, 이것에 대한 구체적 논거를 찾자면 시간이 많이 걸리겠기에 길게 늘일 생각은 없다. 단지 인터넷에 익숙한 사람들은 아마도 30대와 그나마 어떻게든 좀 자유롭고 용감하게 문장을 구사할 수 있는 먹물층이 아니겠는가 생각된다.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블로그라는 것을 운영하지만 그럴 시간도 여건도 용기도 못 갖춘 사람들이 아마도 국민의 절반 이상이 아닐까 짐작되기 때문이다.

 

 

일단 기사를 보면, 10만원권 발행에 대하여

"30대(39.2%<49.5%)만 예정대로 발행해야 한다는 의견이 앞섰다. 그 외 연령층은 발행 유보 의견이 우세해, 40대(53.6%>41.1%)를 비롯해 50대이상(52.5%>32.1%), 20대(49.4%>42.6%) 순으로 정부 방침에 찬성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지지정당별로는 민주노동당 지지층(64.9%>26.9%)이 발행 유보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자유선진당(41.1%<46.6%) 지지층은 발행 의견이, 한나라당(44.9%<45.3%)과 민주당(49.7%>47.0%) 지지층은 의견차가 팽팽한 것으로 나타났다."(경향신문 12월 24일자).

 

여기서 어느 쪽 의견이 정당하냐에 대한 의견은 유보키로 하고, 30대와 민주노동당 지지층의 의견 대립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가 궁금하다. 30대는 민노당 지지층과는 좀 다른 사회-경제적 위치를 점하고 있고, 그래서 둘 사이에는 뭔가 모를 생각의 상이점이 있다는 말이겠다. 어떻게 보면 단지 10만원권 지폐 발행이라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안건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10만원권이 주는 심리적 크기가 그 둘 사이에는 다르다는 말이고, 이 다름은 결국 30대가 민노당 지지층이 될 가능성의 축소로 이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느낌도 든다(아마 그래서 최근에는 진보신당에 젊은 피의 수혈이 많이 이뤄졌고, 그래서 진보신당이 정체성의 혼돈 과정에 있는걸지도!). 이 점에 대해서는 좀 더 차분히 생각해 보기로 하고, 민감한 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일 수밖에 없는 대체복무제에 대한 문제로 넘어간다.

 

 

군 대체복무제에 대해 여론 주도층의 80% 이상이 동의를 하는 반면 국민 일반의 68%가 반대를 한다는데, 이건 너무 심각한 대결구도가 아닌가. 심각한 만큼 뭔가 두 그룹을 나누고 있는 엄청난 골-간극이 있다는 얘기인데,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하여 <공론장의 구조변동> 이라고 국역된 하버마스의 최초의 주저(교수자격논문집,1962-초판,1990-증보판)를 다시 펼쳐 봤다. 여론이라는 것이 어떻게 형성되고 그 맹점은 무엇인지, 그것이 갖는 정치·사회적 파장은 얼마며 그 과정에서 엘리트·부르조아들이 갖는 역할과 폐해는 얼마나 적극적인지, 등등이 궁금하다. 이런 이론적 얘기에 대한 고민은, 밑에 부록삼아 달아두는 펌 서평 한 편으로 대신하고, 각자가 계속 하기로 하고, 일단은 대체복무제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를 살펴본다.

지지난 달에 있은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 연구용역에서는 " 여론주도층의 80% 이상이 양심적 병역 거부자에게 대체복무를 허용하는 방안에 동의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 국회의원(51명), 변호사(30명), 교수(99명), 기자(109명), 종교인(263명) 등 554명을 대상으로 ‘대체복무제에 대한 전문가 의식조사’를 실시한 결과 (...) 응답자의 85.5%가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감옥에 보내는 현 제도는 개선해야 한다’고 답변했다. (...) 이에 견줘 ‘대체복무제 도입은 시기상조’라는 항목에는 19.8%만 동의했다." (한겨레 10월 28일자)

 

반면, "국민 10명 가운데 7명은 종교적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의 대체복무 허용을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병무청은 24일 대전대학교의 '진석용정책연구소'에 의뢰해 종교적 사유 등으로 입영을 거부한 사람들에 대한 대체복무 허용 여부에 관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의 68.1%(1천365명)가 허용에 반대한 것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 연령별로는 60대(87.8%)에서 반대가 가장 많았고 30대(57%)에서 가장 낮았으며 학력은 고졸 이하(75.2%)가 많이 반대했다. (...) 전체 응답자 중 대체복무 찬성 허용은 28.9%(580명)에 불과했다." (한겨레(연합뉴스) 12월 24일자)

 

이렇게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두 의견에서 국방부는 훌륭하게도(!) 국민일반의 의견을 존중하여 대체복무제 도입을 보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는 소식이 있다. 이 사실에 대해서 한겨레 신문은 이렇게 나무란다 :

"국방부가 정책변경 근거로 국민 여론조사 결과를 든 것도 편의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국방부가 지난 10월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에 맡겨 (...) 벌인 전문가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85.5%가 대체복무에 동의한다고 답했다. 소수자 인권문제의 특성상 전문가 견해가 중시돼야 하는데도, 사안에 대한 정보와 관심이 부족한 일반인 상대 여론조사 결과를 근거로 여론몰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전쟁 없는 세상 등 35개 인권·평화 운동단체가 함께하는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는 이날 성명을 내어, “국방부는 여론 핑계를 댈 것이 아니라 국민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2000년 양심적 병역거부가 사회적 의제로 제기된 뒤로도 3000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전과자가 되어야 했다”며 “보편성의 잣대로 소수자들을 판단하는 것은 민주주의 다양성 침해이자 폭력”이라고 주장했다." (한겨레 12월 24일자)

 

감옥 대신에 다른 방법을 찾는다거나, 대체복무의 종류와 기간을 어떻게 할 것인지, 그런 대체복무가 가진자들의 병력기피용으로 전용되어 정작 그것이 필요한 사람들의 기회를 박탈하는 예상되는 악습의 대안은 무엇인지, 등의 제도적·기술적 문제는 차치하고, 이 기사를 보면서 나는 몹시도 혼란스럽다. 먹물 낀 내 처지에 어울리게, "소수자 인권", "평화", "양심", "자유" 등의 파수꾼으로 나선 전문가들의 편에 서야할지, "사안에 대한 정보와 관심이 부족한 일반인"의 감성적 판단을 존중해야할지, 좀 난감하다. 그러나 대체복무제를 반대하는 국민의 68%, 더구나 고졸 이하 학력자의 75% 라는 숫자는 그 어떤 훌륭한 이론과 주장도 압도하는 너무 큰 숫자가 아닐까? 특히 75%를 보인 고졸 이하 학력자들이 이제는 충분히 '소수자'로 대우(취급이 맞겠지!) 될 시점이 멀지도 않은 듯하고, 이 75% 라는 숫자 속에 숨어있을 (그들이 오랫동안 속으로만 삼켰을) 사회적 배신감과 스스로의 처지에 대한 울분의 '감정'은 과연 무시해도 좋은 것일까? 아닐 듯하다. 아닐 것이다.

 

여기서 소위 '진보'가 좀 애매해진다. 앞에 열거된 '전문가적 가치'들을 존중하지 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전문가라는 명찰만 달았지 실상은 엘리트·지배계층으로서 힘없는 '일반인'의 희생으로 스스로의 위치만 다지는데 익숙한 그들을 편들 수도 없지 않은가? 가까운 주위만 둘러봐도 위의 여론조사 대상이 된 높으신 분들 중에서 자식을 군에 보내는 경우는 촌스런 도덕성이나 맹목의 국가관이 투철한 몇몇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제 세상이 다 아는 마당에, 진보가 존중해야할 '전문가적 가치'라니...  결국은 '우리나라만의 특수성' 쪽에서 다시 변명거리를 찾아야 하나? 잘 모르겠다. [생각의 탈출구가 없으니 일단 책 속으로나 숨자.]

 

 

Strukturwandel Der Öffentlichkeit : Untersuchungen Zu Einer Kategorie Der Bürgerlichen Gesellschaft, Jürgen Habermas, 1962, 1990 (17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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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2월 12일 토요일

학업성취도, 경제력과 유전자 사이에서...

12월 9일에 한국교육과정평가원(KICE) 이라는 곳에서 지난 5년 간의 대학수학능력시험의 결과를 분석하여 발표했다. 수능 점수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변수가 무엇인가에 대한 연구분석인데, 분석의 기준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대별된다 : 지역효과(강남), 환경효과(경제력), 학교유형효과(특목고). 여기서 학교격차보다는 지역격차가 더 크다는 것은 쉽게 수긍이 가고, 특목고 출신이 일반고 상위권 학생들에 비해 많이 더 나은 결과를 낳지는 못했다는 사실(선발 효과일 뿐 교육 효과는 아니라는 분석)도 크게 놀랍지는 않다. 그러나 부모의 경제력보다는 학력수준이 자식의 점수에 더 결정적이라는 연구 결과는 -일견 그럴듯해 보이기도 하지만- 약간의 진보적(?) 논쟁이 필요한 지점이겠다. 경제결정론 보다도 유전자결정론이 우선한다는 분석적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흔히 속된 말로 '개천에서 용나는 시대는 지났고 이제는 공부도 부잣집 자식이 잘한다'는 경제결정론적 사회비판이 진보적 시각에서 누차 제기됐던 게 사실이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공감을 해왔다. 그런데 이번 연구 결과는 그 반대의 결과를 알려준다 : '부잣집 자식이라고 다 공부를 잘하는 것은 아니고 학벌유전적 효과가 자식의 성공에 더 지배적이다' 라고. 물론 학벌 높은 부잣집이나 학벌 낮은 가난한 집의 경우는 논의의 대상도 안되겠지만, 문제는 '학벌 낮은 부자'와 '학벌 높은 안-부자'의 두 경우 중에서 자식의 성공에 더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돈이 아니라 부모의 학력이라는 점이다 (아래 기사에서는 '부모'가 아니라 '아버지의 학력 수준'이 자식의 성적에 비례한다고 구체화하고 있으나, 우리적 기준에서 아버지보다 학력이 높은 어머니는 많지 않을테니 기사의 '아버지' 자리에 '부모'를 대체시켜도 무방히리라 여겨짐). 

 

이런 연구 결과는, 돈은 있으나 못 배운 한 때문에 자식에게 물량공세적 과외라도 시켜 좋은 대학 보내려는 부모들에게는 조금 실망스러울테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도 좋을까. '경제적 계급'이든 '지적 계급'이든 둘 다 -일찍이 부르디외(P.Bourdieu, 1930~2002) 학단에서 조사한 바와 같이- 자식의 장차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중요한 자본(capital)인 것이 사실이다 (아래 그림 참조). 그러나 경제자본(capital economique)은 말할 것도 없고  문화자본(capital culturel) 종속적인 사회구조도 어떻게든 정당하지 못하다면, 경제결정론이나 유전자결정론이나 둘 다 사회적 악인 것은 분명하다. 여기서 어느 것이 더 우선적 지위를 갖느냐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것이든 미래세대의 현재를 결정하는 요인으로 작용해서는 안된다는 말이겠다.

 

이러한 인식적 공감이 있다고 하더라도 유전적 문화자본이 불평등하게 유증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고 오히려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해서 '어쩔 수 없으니 그대로 받아들이고 불평등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정치적 능력(perfection politique)을 무력화시키는 패배적 발상이 된다. 문화자본의 작은(?) 차이가 각자에게 각기 다른 종류의 직업을 선택하게 하는 요인이 될 수는 있어도, 그 종사하는 직무의 다름이 공평한 시민적·인간적 가치의 차이로까지 이어지는 -명시적이든 묵시적인든- 틀을 무화시키는 작용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정치가 아닐까. 지금 필요한 것은 정치라는 말이겠다.

 

참조: 한겨레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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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pace_social_de_Bourdieu.svg(Fichier SVG, résolution de 800 × 800 pixels, taille : 37 Kio)

 

2009년 12월 1일 화요일

사회주의 이념의 현실적 의미는? (박노자 글에서)

'한겨레'에 있는 '박노자의 글방'(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을 정기구독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사가 안된 좋은 글은 인터넷한겨레 메인의 '블로그' 란을 통해 친절히 안내해주는 덕분에 오늘도 우연히 좋은 독서를 했다. 성공 안-성공, 현실적 실현가능성 여부를 떠나서, 우리의 구체적 삶 속에서 '사회주의 이념'이 갖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에 대한 아주 필요하고 정당한 논변을 박노자는 아래 글에서 잘 보여준다. 누구나 자신이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 라면 한번쯤 반드시 외쳐보고싶은 주장이겠으나 정리가 안돼서 머릿속으로만 간직하고 있던 그런 것들을 우리를 대신해서 그가 아주 깜끔히 정리해준 글로 보여진다. 글의 핵심이라고 내게 보여지는 부분만 골라다 놓는다 (제목, 번호, 기호는 원문의 것이 아님). 

 

(...) 우리 생전에 돈이라는 매개체가 없는 지상낙원을 꼭 건설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 이게 어디까지나 혹세무민일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따져보면, 굳이 확률을 이야기하자면 이 세계가 일련의 국지전을 통해 패권 재배치가 되어 보다 야만적인 자본주의로 계속 이어질 가능성은, 이성에 입각한 세계적 규모의 사회주의를 실행할 가능성보다는 훨썬 더 높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는 - 오늘의 일본처럼 - "개혁사기꾼"형, "노빠"형 정치꾼들이 일본 민주당 식의 잡탕식 "개혁" 정당 하나 더 조립해서 언젠가 정권을 탈환하여 부르주아 국가를 약간 다듬어서 계속 과거대로 운영하는 것은, 민노당이나 진보신당의 집권보다 훨씬 더 현실적 시나리오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시스템의 위기가 아주 커져 진보정당의 집권이 부르주아에게마저도 시스템 전체를 구제하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을 가능성도 배제 못합니다).

그런데 "진보"할 가치는, 그 무슨 "집권"에만 있는 것은 꼭 아닙니다 (이 부분도 물론 도외시할 수는 없지만). 옛날 유인석 선생이나 최익현 선생이 기의하신 것은, 왜적을 현실적으로 이길 수 있다고 한 것이 아니지 않았습니까? 인간답게 마지막까지 살든지, 그게 안되면 적어도 인간답게 죽어 금수 같은 왜양이 설치는 이 더러운 세계에서 살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굳이 "죽음"을 갖고 이야기할 것은 아니지만, 대의는 같을 것입니다. 사회주의하는 목적이란 결국 "인간답게 살기 위함"일 듯합니다. 권력이 주어지고 말고 등등은 다 부수적 부분들이죠. 인간의 삶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층위가 있는 것 같습니다.

1. 가장 기본적 층위/생물적 생존 : 아직까지 제약이 좀 있지만 (세계 최장 노동시간의 나라 대한민국에서의 많은 노동자들의 수면 부족, 자녀 양육에 있어서의 문제들과 출산율 저하 경향, 무상 의료의 부재로 말미암은 제문제 등) 일단 후기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한국과 같은 준주변부 국가에서는 이 정도는 다소 보장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2. 기본적 사회적 역할의 수행 가능성 : 아이로서 정상적으로 성장하고, 젊은이로서 연애를 할 만큼 해보고, 어른으로서 부모에게 제대로 해드리면서 아이를 잘 키우고, 노후 생활을 조용하고 안정되게, 그리고 창조적으로 보내고, 이런 것입니다. 아이의 절대 대다수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알바하느라 연애고 뭐고 다 때려치우는 젊은이들이 부지기수고, 집에 밤 한 시에 돌아오는 아버지들이 아이를 한 번 보는 것도 힘들고, 노인들의 빈곤율이 약 40%에 달하는 이 위대한 토건 공화국 대한민국에서는 이 둘째 층위 정도는 벌써 거의 보장 못하죠. 한데, 제대로 된 복지국에서는 이 정도까지도 보장해줄 확률은 좀 있습니다. 노르웨이 정도면 아이 때에 제대로 놀고 젊을 때에 제대로 연애와 섹스를 즐기고, 부모가 되면 저녁 5시부터 아이와 같이 놀고, 노후 인생을 인간답게 보낼 확률은 대단히 높습니다. 대다수가 그렇게 살죠.

3. 대인 관계를 통한, 창조적 노동을 통한 (...) 진정한 자아 실천 : (...) 우리 머리, 마음 속에서 외부에서 주입된 지식과 생각, 감정 등을 빼면 과연 "우리만"의 것이라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될까요? 한국이든 노르웨이든 자본주의 하에서 사는 인간들은 자기 자신들로부터 아주 심각하게 소외돼 있습니다. 아무 의미도 없는, 부질 없는 벌이, 오락, 상품화된 정보의 흐름 속에서 인간이란 묻히고 말죠.

==> 바로 여기에서 사회주의의 의미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미 "뜻"을 잃은 세계에서는 진보활동이란 그 "뜻"을 회복하기 위한 하나의 노력에 해당될 것입니다. 진보/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예컨대 "나만의 안목" 같은 게 생깁니다. 연예계부터 "경제 회복"에 대한 당국의 망설까지, 이 세상을 이루는 그 모든 허위, 가식, 거짓말, 모든 거품에 대해서는 "이게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의식과 용기가 생기고, 진정한 의미의 "자아"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적 흐름에 몸과 마음을 그저 맡기기만 하면 진정한 의미의 "개인"도 될 수 없지만 사회주의는 "비판적 개인"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개인들이 만나면 소통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것이죠. 어떤 상호 이용 등이 개입되지 않는, 동지적 관계의 기쁨도 맛볼 수 있고요... 사회주의란, 단순히 "집권을 위한 정당 운동" 차원만은 아닙니다 (그런 차원도 당연히 있지만). 이 폐허에서 인간으로 다시 거듭나기 위한, "뜻"을 되찾기 위한 실존적 운동이죠. 종교가 이미 다 상품화돼서 의미를 잃은 세상에서는, 사회주의야말로 예수와 석가의 뜻을 제대로 받드는 "마지막 인간들"의 집합이기도 합니다.

출처: 박노자, "사회주의, 그리고 인생의 의미", 만감: 일기장 2009/11/28 03:59, 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24698 

 

 

그리고 같은 얘기는 아니지만, 같은 곳(한겨레 메인 블로그)에 걸려있는 어떤 글의 제목에 이끌려, 역시 우연히 발견한 한 블로그의 글이 어느정도 의미있게 느껴져서 부분펌 한다. 굳이 박노자의 글과 엮어보자면, "기본적 사회적 역할의 수행"이 어느정도 이뤄지는 서구-유럽 (복지)국가에서는 그 '수평적 사회구조'로 의하여 '루저에 대한 공포'가 남녀를 불문하고 많지 않지만, 사회주의적 개입이 거의 차단된 철저한 자본주의적 '수직적 사회구조'를 갖는 한국에서는 모두가 루저가 될 가능성에 심하게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남자뿐만이 아니라 여자들도 마찬가지로 언제나 -의식하든 아니든 간에- '루저에 대한 공포' 속에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인생의 운명이 더 타율적인(남자만나기에따라인생이바뀔수있는) 여자들은 불가피하게 남자들을 루저와 안-루저로 구별하여 선택하도록 심리적으로 구조적 강요를 받고 있으며, 이런 상황의 조잡한 노출이 바로 최근의 '루저대란' 이라고 글쓴이는 파악하는 듯하다. 좋은 지적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은 OECD 국가들 중에서도 특히 불평등 정도가 심한 나라일 뿐만 아니라 , 안전망이 유명무실한 대표적인 나라이다. 더구나 사회조직이 서구의 다른 사회보다 더욱 더 수직적으로 조직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젊은 처녀들은 함부로 짝짓기하면 , 장래에 고생이 심할 것이라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더 피부로 느끼고 있다. (...) 된장녀가 키 작은 젊은 남자들을 하필이면 “루저”라고 표현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짝짓기 상대를 잘못 고르면 된장녀 자신이 “루저”가 되는 사회적 현실을 반영한 것이자 , 자신의 미래에 대한 극도의 불안감을 표출한 것이다.

한편 서구의 버거녀들은 어떤가? 머리? 재산과 지위? 큰 키? 성격? 불평등 정도가 낮고 사회 복지가 잘 된 나라에서는 짝을 고를 때 , 그렇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못 먹어도 본전은 하는 게임이다. 그러므로 버거녀들은 “끌(꼴?)리는 대로” 짝짓기를 할 개연성이 더 높다. 그렇다고 버거녀들은 아무하고나 짝짓기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

진화심리학자 밀러에 의하면 “남자들은 그들의 있음직한 사회경제적 우세(지배)를 (무의식적으로) 광고하기 위해 정치적 보수주의를 사용하고 , 여성들은 그들의 양육 능력을 광고하기 위해 정치적 자유주의를 사용한다. 젊을 적에는 자유주의적이었다가 중년이 되면 보수적이 되는 현상은 단순히 자기 이익을 위한 합리적인 변동만이 아니라 , 사회적 우세와 소득이 점점 더 짝짓기에서 더 중요해지기 때문이다.”(http://www.amazon.com/Spent-Sex-Evolution-Consumer-Behavior/dp/0670020621/ref=sr_1_1?ie=UTF8&s=books&qid=1259485987&sr=1-1 ).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나이가 든 중장년 남성들과 여성들에게도 차별화 전략의 범위가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 한국의 된장년들은 젊은 시절에 “자유 교육(liberal education)”을 받지 못하거나 , 추구하지 않은 결과 관심과 취미가 그 폭과 종류가 참으로 천박한 것처럼 보인다. 남성들이 자신의 지성과 호기심, 그리고 지적 욕구를 과시할 여지가 거의 없다.

출처: "루저남,된장녀 그리고 진화심리학", 낙서장 2009/11/29 19:08, http://blog.hani.co.kr/pangloss/32637 

 


2009년 11월 24일 화요일

쌀-식량안보 / DAC-Africa원조

이명박이 복이 많은지,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둔 복 없는 국민을 하늘이 가엾게 여긴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올해는 태풍도 모두 비켜가서 풍년이 들었단다. 풍년이 들면 들수록 농민들의 이마에는 주름만 더 는다니, 이 무슨 21세기의 모순이란 말인가! 점점 서구화 되어가는 우리의 식문화 때문에 쌀 소비가 줄고 그래서 쌀값이 폭락하고 농민은 울상이라는데, 그렇다고해서 변해가는 도시인들의 생활양식을 늘 가마솥에 붙들어 매 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마당에 '식량안보'를 방기한 체 -꼭 누구처럼- '이제 우리 농업도 바뀌어야 한다'면서 우리의 생명줄을 사악한 시장의 법칙 속으로 내 몰 수도 없어 보인다.

 

그래서 아래에 옮기는 시론의 필자인 농경제학자께서는 '쌀 소득보전직불제 만으로는 농민의 이익을 대변하기에 부족하니 생산을 줄이기 위한 휴경보전제를 동시에 실시하자'는 주장을 한다. 그런데 -나도 촌에서 고등학교 마칠 때까지 살았지만- 농민의 마음이라는 것이 어찌 그렇게 빈 땅을 놀릴 수가 있을까 싶다. 없던 시절에 집 주변주변과 논둑∙밭둑에 까지 하다못해 콩이라도 심어 키우고 싶은 것이 농민의 심정일텐데, 돈을 줄테니 멀쩡한 땅을 놀리라는 것은, 지력 향상 차원이라면 모를까, 너무 계산기적 고려가 아닌가 싶다. 더구나 뼈빠지게 일한 몫과 땅을 놀린 댓가로 돌아오는 몫이 똑같음에서 오는 의욕상실의 감정을 어떻게 조화롭게 정책적으로 조율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마침 OECD 산하의 개발원조위원회(DAC)라는 곳에 한국도 오는 25일에 가입을 하여 빈곤국을 돕는 행렬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있다. 또 '명박표 실용'의 가면을 쓰고는 뭔가 침략주의적 댓가를 기대하며 아프리카 등의 못사는 나라의 원조에 동참하려는 속셈은 미리 버리라고 아래 경향의 사설은 조언한다. 설령 지금까지 선진국들이 그런 행태를 보인 것이 아닌 건 아니지만 그래서는 안된다니, 지당한 말씀이다. 지금 아프리카에서는, 인구는 많고 대지의 자연적 척박함으로 인해 식량의 절대 생산량이 부족하여, 기아에 신음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은 안가봐도 가히 짐작할 수가 있다. 우리의 남아도는 쌀로 가까운 북한부터 도우면 좋게지만 이념적∙정치적 고려가 그런 행보를 막고 있으니(반동들에게 자꾸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이제 개발원조위원회라는 곳에도 가입을 한다니 -좀 궁색하고 미안하지만 우리나라가 아직은 말로만 OECD 회원국인 처지이니- 과감하게 아프리카 쌀 지원에 나서면 어떨까 싶다. 그들도 살리고 우리 농민도 살고 국가적 식량안보 시스템도 지켜내고, 일거 3덕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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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23일 월요일

까뮈 & 빵떼옹

Dictionnaire-Camus.jpg 
Dictionnaire Albert Camus, sous la dir. de J. Guérin, Robert Laffont, 2009(le19 nov.), 974 p., 30 euro.

내년 1월 4일(아마), 까뮈 사망 50 주년을 기해 까뮈의 유해를 빠리 빵떼옹(만신전)으로 모시자고 사르코지가 제안을 했고, 까뮈의 자식들은 거부한다는 소식이 있었다(경향에도 기사 있음). 사르코지의 입장에서는 자기 임기 중에도 남들처럼 누군가 위인을 빵떼옹으로 모시는 기록을 남기려는 속셈으로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려도 없이 좌우를 막론하고 소문난 위인을 찾던 중 마침 까뮈를 고른 모양이다. 그런데 까뮈의 자식들은 <반항자>로 표상되는 까뮈를 우파정권의 '상품'으로 넘길 수 없다는 심정인 듯한데, 표현상으로는 '아버지가 빵떼옹 같은 답답한 곳을 싫어할 것'이기 때문에 사르코지의 제안을 거부했다고 한다. 늘 그렇듯이, 불굴의 사르코지 측은 까뮈의 두 자녀를 계속 설득 중이라는데...
이런 와중에 마침 <까뮈 사전>(사진)을 그저께 출간한 전문가의 의견을 '옵세르바떼르'라는 잡지에서 들어보았다 함(아래 기사). 전문가는, 부시의 친구인 사르코지의 정치는 까뮈가 방어하고자 한 가치와 개념과는 정반대에 있는데 어떻게 말도 안되는 그런 발상이 가능하겠냐고 펄쩍 뛴다. 잡지의 사이트에 논의와 관련된 자료를 잘 모아두고 있기에 그대로 퍼온다.  

Faut-il panthéoniser l'auteur de «l'Homme révolté»?
«Qu'on laisse Camus à Lourmarin!» / Par Jeanyves Guérin (Universitaire)
S'il est une personnalité qui mériterait  de reposer au Panthéon,
c'est bien l'écrivain, le penseur, le citoyen qu'est Camus. Mais pas du Panthéon que nous connaissons, d'un Panthéon idéal où il rejoindrait non seulement Zola, Jaurès et Malraux, mais aussi de Gaulle, Mendès France, Manouchian, Baudelaire, Proust, Beckett... Camus avait choisi d'être enterré à Lourmarin, dans le village qui l'avait accueilli, loin de Paris, de ses palais et de ses élites. Qu'on l'y laisse.
L'idée lui aurait sans doute déplu. L'initiative, de toute façon, est lancée trop tôt ou trop tard. On l'imagine lancée par Mendès France, Rocard ou Jospin qui, mieux que Sarkozy, méritaient de présider aux destinées de la France. Imagine-t-on Sarkozy lisant un discours à la gloire de Camus rédigé par Guaino... Sarkozy est l'ami de Bush, Kadhafi, Poutine, Berlusconi. Sa politique est aux antipodes des valeurs et conceptions que défend Camus. Au lieu de gesticuler, qu'il supprime le bouclier fiscal, qu'il s'excuse publiquement de ses insultes aux universitaires, qu'il vide Hortefeux et qu'il s'impose une cure de discrétion médiatique.» (Propos recueillis par Grégoire Leménager)
Jeanyves Guérin : Professeur de littérature à l'université Paris-III Sorbonne-Nouvelle, Jeanyves Guérin vient de diriger la publication d'un remarquable « Dictionnaire Albert Camus ». Il réagit, pour BibliObs.com, à l'annonce d'une possible entrée d'Albert Camus au Panthéon.

 

Samedi 20 nov. Catherine Camus, sa fille, n'a « que des doutes » et le fils d'Albert Camus refuse le Panthéon pour son père

Sarkozy, Camus : même combat ? (suite)

Michel Onfray : « Albert Camus est un libertaire irrécupérable »

Camus, le nouveau philosophe

Tout notre dossier « Spécial Camus »

Le Panthéon, sa vie, son oeuvre

Revenir à la Une de BibliObs.com

 

출처: http://bibliobs.nouvelobs.com/20091120/16006/quon-laisse-camus-a-lourmarin#

2009년 11월 20일 금요일

축구 이야기 (프랑스의 수치)

나는 공으로 하는 운동은 다 못하고 테레비도 뉴스 외에는 거의 안 보지만, 축구 경기를 보는(운동장에 갈 돈은 없고 테레비로) 것은 좋아한다. 어제 저녁에(11/18일 21시, 현지시간) 빠리에서 열린 내년 6월 남아공월드컵 마지막 티켓을 위한 프랑스 대 아일랜드 간의 2차전 마지막 경기가 있었다. 지단(Z.Zidane)과 대통령까지 경기장에 나와서 시합을 지켜볼 정도로 많은 관심과 기대를 모았던 경기였다. 결과는 양 팀이 1:1로 비겨서, 1차전 아일랜드 경기에서 1:0으로 이겼던 프랑스가 월드컵 본선 진출권을 가까스로 확보했다. 그런데 문제가 많다. 승리를 향한 투지가 하늘을 찌를 정도로 아일랜드 팀의 기동성과 열성은 대단했고, 전반전에 당당히 한 골을 먼저 넣음으로써 두 팀은 이제 제로 상태에서 다시 격돌하는 상황이 됐다. 결국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을 벌였지만 모두들 승부차기로 결판이 나리라고 예상하던 순간에 마침내 프랑스가 한 골을 넣어서 경기는 1:1로 끝났고, 아일랜드 팀은 억울한 실망의 울음을 삼켜야만 했던 것.

 

뭐가 문제고 왜 억울하냐면, 프랑스가 얻은 골이 티에리 앙리(Thierry Henry)의 얍삽한 핸드링 반칙에 의한 어시스트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상대편 골라인으로 넘어가는 골을 앙리가 팔로 막고 손으로 조정한 후 발로 어시스트를 했다는 사실을 심판만 모르고 웬만한 관중들이나 테레비 시청자들은 분명히 다 봤다는 것. 다음날 그 반칙은 동영상(아래)과 사진에 의해 거의 분명한 사실로 모두가 인정하는 상황이 됐고, 결국 프랑스는 체육부 장관과 체육 국가비서까지 기자회견을 하며 프랑스 팀의 무능과 수치를 나무랬다고 한다. 반면, 아일랜드는 축구협회와 총리까지 나서서 FIFA에 재경기를 정식으로 요청할 것이라는 소식도 있다. 바야흐로 스포츠가 정치-외교 문제로 비화(飛火)하는 국면이 됐다(기사 4,5).

 

여기서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누가 이기고 누가 진 사실도 아니고 경기를 다시 하든 말든 별로 지대한 관심도 없지만, 단지 경기 관람 후 테레비 기자와의 간단 인터뷰에서 프랑스 대통령이라는 자가 한 발언이다. 경기는 별로 훌륭하지 못했지만 중요한 것은 프랑스가 월드컵 본선티켓 확보에 성공했다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단다. 역시나 사르코지는 우리의 성공시대의 표상인 mb각하와 경쟁적으로 부시의 친구였던 인물답게, 수단이야 어떻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천연의 발상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겠다. 스포츠가 청소년의 정신건강에 미치는 지대한 영향이 어떻고하는 윤리적인 문제는 여기서 잠시 접어두고, 나는 다음과 같은 상상을 해본다. 부당하게 획득한 월드컵 티켓을 갖고 부끄럽게 본선에 나가느니보다는 설령 본선행이 좌절되는 한이 있더라도, 아일랜드의 재경기 요청을 FIFA의 강제가 있기 전에 프랑스가 먼저 나서서 받아들이는 모습 말이다. 분명히 심판의 잘못이 있었고 확연한 앙리의 속임수가 눈에 보이는 상황에서, 대충 뭉그적거리면서 문제의 책임을 심판에게 떠넘기거나 앙리의 양심을 거북하게 하느니보다는 월드컵 본선행 좌절 가능성(재경기)을 프랑스가 당당히 수용한다면, 그것이 -'역시 프랑스' 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더 프랑스다운 선택이 아닐까 싶다. 뭐, 반면교사(反面敎師),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자는 얘기.

 

이하 관련 동영상과 기사 :

 

1. Liberation Sports 19/11/2009 à 11h28 [관련 동영상 모음: 마라도나-1986 등]
Jeu de main, jeu de coquins // TEXTE+VIDEOSLe geste d'Henry face à l'Irlande, amenant le but de Gallas, n'est pas une première. De nombreux buts ont été inscrits de l'avant-bras. Le plus célèbre reste celui de Maradona en quarts de finale du Mondial 1986, avant celui de Vata (1990) face à l'OM, de Messi ( 2007)...
http://www.liberation.fr/sports/0101603839-jeu-de-main-jeu-de-coquins

 

2. Thierry Henry: avec la main, avec la tête, avec les pieds
 A ECOUTEREn 1978, Marius Trésor chantait «Avec la tête, avec les pieds». 20 ans plus tard, d'une main, Thierry Henry qualifie la France en coupe du monde. Il faut de tout pour gagner au foot.
http://www.liberation.fr/sports/06011442-thierry-henry-avec-la-main-avec-la-tete-avec-les-pieds

 

3. Après la main de Dieu, la main de la Grenouille?
Dans la presse irlandaise comme sur Internet, Thierry Henry et sa main gauche sont au cœur des discussions, après la qualification arrachée (volée?) des Bleus pour la Coupe du monde 2010.
http://www.liberation.fr/sports/0101603855-apres-la-main-de-dieu-la-main-de-la-grenouille

 

4. La classe politique refait le match France-Irlande
http://www.liberation.fr/sports/0101603851-bachelot-raymond-il-faut-que-tu-te-mobilises

 

5. France-Eire: l'affaire tourne à l'incident diplomatique
Soutenant sa fédération nationale, le Premier ministre irlandais demande que le match entre son pays et la France soit rejoué. Fillon lui demande de «ne pas s'immiscer dans les affaires de foot». 357 réactions
http://www.liberation.fr/sports/0101603909-l-eire-demande-a-rejouer-le-match-contre-la-fra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