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1일 화요일

사회주의 이념의 현실적 의미는? (박노자 글에서)

'한겨레'에 있는 '박노자의 글방'(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을 정기구독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사가 안된 좋은 글은 인터넷한겨레 메인의 '블로그' 란을 통해 친절히 안내해주는 덕분에 오늘도 우연히 좋은 독서를 했다. 성공 안-성공, 현실적 실현가능성 여부를 떠나서, 우리의 구체적 삶 속에서 '사회주의 이념'이 갖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에 대한 아주 필요하고 정당한 논변을 박노자는 아래 글에서 잘 보여준다. 누구나 자신이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 라면 한번쯤 반드시 외쳐보고싶은 주장이겠으나 정리가 안돼서 머릿속으로만 간직하고 있던 그런 것들을 우리를 대신해서 그가 아주 깜끔히 정리해준 글로 보여진다. 글의 핵심이라고 내게 보여지는 부분만 골라다 놓는다 (제목, 번호, 기호는 원문의 것이 아님). 

 

(...) 우리 생전에 돈이라는 매개체가 없는 지상낙원을 꼭 건설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 이게 어디까지나 혹세무민일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따져보면, 굳이 확률을 이야기하자면 이 세계가 일련의 국지전을 통해 패권 재배치가 되어 보다 야만적인 자본주의로 계속 이어질 가능성은, 이성에 입각한 세계적 규모의 사회주의를 실행할 가능성보다는 훨썬 더 높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는 - 오늘의 일본처럼 - "개혁사기꾼"형, "노빠"형 정치꾼들이 일본 민주당 식의 잡탕식 "개혁" 정당 하나 더 조립해서 언젠가 정권을 탈환하여 부르주아 국가를 약간 다듬어서 계속 과거대로 운영하는 것은, 민노당이나 진보신당의 집권보다 훨씬 더 현실적 시나리오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시스템의 위기가 아주 커져 진보정당의 집권이 부르주아에게마저도 시스템 전체를 구제하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을 가능성도 배제 못합니다).

그런데 "진보"할 가치는, 그 무슨 "집권"에만 있는 것은 꼭 아닙니다 (이 부분도 물론 도외시할 수는 없지만). 옛날 유인석 선생이나 최익현 선생이 기의하신 것은, 왜적을 현실적으로 이길 수 있다고 한 것이 아니지 않았습니까? 인간답게 마지막까지 살든지, 그게 안되면 적어도 인간답게 죽어 금수 같은 왜양이 설치는 이 더러운 세계에서 살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굳이 "죽음"을 갖고 이야기할 것은 아니지만, 대의는 같을 것입니다. 사회주의하는 목적이란 결국 "인간답게 살기 위함"일 듯합니다. 권력이 주어지고 말고 등등은 다 부수적 부분들이죠. 인간의 삶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층위가 있는 것 같습니다.

1. 가장 기본적 층위/생물적 생존 : 아직까지 제약이 좀 있지만 (세계 최장 노동시간의 나라 대한민국에서의 많은 노동자들의 수면 부족, 자녀 양육에 있어서의 문제들과 출산율 저하 경향, 무상 의료의 부재로 말미암은 제문제 등) 일단 후기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한국과 같은 준주변부 국가에서는 이 정도는 다소 보장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2. 기본적 사회적 역할의 수행 가능성 : 아이로서 정상적으로 성장하고, 젊은이로서 연애를 할 만큼 해보고, 어른으로서 부모에게 제대로 해드리면서 아이를 잘 키우고, 노후 생활을 조용하고 안정되게, 그리고 창조적으로 보내고, 이런 것입니다. 아이의 절대 대다수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알바하느라 연애고 뭐고 다 때려치우는 젊은이들이 부지기수고, 집에 밤 한 시에 돌아오는 아버지들이 아이를 한 번 보는 것도 힘들고, 노인들의 빈곤율이 약 40%에 달하는 이 위대한 토건 공화국 대한민국에서는 이 둘째 층위 정도는 벌써 거의 보장 못하죠. 한데, 제대로 된 복지국에서는 이 정도까지도 보장해줄 확률은 좀 있습니다. 노르웨이 정도면 아이 때에 제대로 놀고 젊을 때에 제대로 연애와 섹스를 즐기고, 부모가 되면 저녁 5시부터 아이와 같이 놀고, 노후 인생을 인간답게 보낼 확률은 대단히 높습니다. 대다수가 그렇게 살죠.

3. 대인 관계를 통한, 창조적 노동을 통한 (...) 진정한 자아 실천 : (...) 우리 머리, 마음 속에서 외부에서 주입된 지식과 생각, 감정 등을 빼면 과연 "우리만"의 것이라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될까요? 한국이든 노르웨이든 자본주의 하에서 사는 인간들은 자기 자신들로부터 아주 심각하게 소외돼 있습니다. 아무 의미도 없는, 부질 없는 벌이, 오락, 상품화된 정보의 흐름 속에서 인간이란 묻히고 말죠.

==> 바로 여기에서 사회주의의 의미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미 "뜻"을 잃은 세계에서는 진보활동이란 그 "뜻"을 회복하기 위한 하나의 노력에 해당될 것입니다. 진보/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예컨대 "나만의 안목" 같은 게 생깁니다. 연예계부터 "경제 회복"에 대한 당국의 망설까지, 이 세상을 이루는 그 모든 허위, 가식, 거짓말, 모든 거품에 대해서는 "이게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의식과 용기가 생기고, 진정한 의미의 "자아"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적 흐름에 몸과 마음을 그저 맡기기만 하면 진정한 의미의 "개인"도 될 수 없지만 사회주의는 "비판적 개인"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개인들이 만나면 소통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것이죠. 어떤 상호 이용 등이 개입되지 않는, 동지적 관계의 기쁨도 맛볼 수 있고요... 사회주의란, 단순히 "집권을 위한 정당 운동" 차원만은 아닙니다 (그런 차원도 당연히 있지만). 이 폐허에서 인간으로 다시 거듭나기 위한, "뜻"을 되찾기 위한 실존적 운동이죠. 종교가 이미 다 상품화돼서 의미를 잃은 세상에서는, 사회주의야말로 예수와 석가의 뜻을 제대로 받드는 "마지막 인간들"의 집합이기도 합니다.

출처: 박노자, "사회주의, 그리고 인생의 의미", 만감: 일기장 2009/11/28 03:59, 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24698 

 

 

그리고 같은 얘기는 아니지만, 같은 곳(한겨레 메인 블로그)에 걸려있는 어떤 글의 제목에 이끌려, 역시 우연히 발견한 한 블로그의 글이 어느정도 의미있게 느껴져서 부분펌 한다. 굳이 박노자의 글과 엮어보자면, "기본적 사회적 역할의 수행"이 어느정도 이뤄지는 서구-유럽 (복지)국가에서는 그 '수평적 사회구조'로 의하여 '루저에 대한 공포'가 남녀를 불문하고 많지 않지만, 사회주의적 개입이 거의 차단된 철저한 자본주의적 '수직적 사회구조'를 갖는 한국에서는 모두가 루저가 될 가능성에 심하게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남자뿐만이 아니라 여자들도 마찬가지로 언제나 -의식하든 아니든 간에- '루저에 대한 공포' 속에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인생의 운명이 더 타율적인(남자만나기에따라인생이바뀔수있는) 여자들은 불가피하게 남자들을 루저와 안-루저로 구별하여 선택하도록 심리적으로 구조적 강요를 받고 있으며, 이런 상황의 조잡한 노출이 바로 최근의 '루저대란' 이라고 글쓴이는 파악하는 듯하다. 좋은 지적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은 OECD 국가들 중에서도 특히 불평등 정도가 심한 나라일 뿐만 아니라 , 안전망이 유명무실한 대표적인 나라이다. 더구나 사회조직이 서구의 다른 사회보다 더욱 더 수직적으로 조직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젊은 처녀들은 함부로 짝짓기하면 , 장래에 고생이 심할 것이라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더 피부로 느끼고 있다. (...) 된장녀가 키 작은 젊은 남자들을 하필이면 “루저”라고 표현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짝짓기 상대를 잘못 고르면 된장녀 자신이 “루저”가 되는 사회적 현실을 반영한 것이자 , 자신의 미래에 대한 극도의 불안감을 표출한 것이다.

한편 서구의 버거녀들은 어떤가? 머리? 재산과 지위? 큰 키? 성격? 불평등 정도가 낮고 사회 복지가 잘 된 나라에서는 짝을 고를 때 , 그렇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못 먹어도 본전은 하는 게임이다. 그러므로 버거녀들은 “끌(꼴?)리는 대로” 짝짓기를 할 개연성이 더 높다. 그렇다고 버거녀들은 아무하고나 짝짓기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

진화심리학자 밀러에 의하면 “남자들은 그들의 있음직한 사회경제적 우세(지배)를 (무의식적으로) 광고하기 위해 정치적 보수주의를 사용하고 , 여성들은 그들의 양육 능력을 광고하기 위해 정치적 자유주의를 사용한다. 젊을 적에는 자유주의적이었다가 중년이 되면 보수적이 되는 현상은 단순히 자기 이익을 위한 합리적인 변동만이 아니라 , 사회적 우세와 소득이 점점 더 짝짓기에서 더 중요해지기 때문이다.”(http://www.amazon.com/Spent-Sex-Evolution-Consumer-Behavior/dp/0670020621/ref=sr_1_1?ie=UTF8&s=books&qid=1259485987&sr=1-1 ).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나이가 든 중장년 남성들과 여성들에게도 차별화 전략의 범위가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 한국의 된장년들은 젊은 시절에 “자유 교육(liberal education)”을 받지 못하거나 , 추구하지 않은 결과 관심과 취미가 그 폭과 종류가 참으로 천박한 것처럼 보인다. 남성들이 자신의 지성과 호기심, 그리고 지적 욕구를 과시할 여지가 거의 없다.

출처: "루저남,된장녀 그리고 진화심리학", 낙서장 2009/11/29 19:08, http://blog.hani.co.kr/pangloss/32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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