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맨날 보지만 한번도 본 적이 없던, 처음 만나는 김경애 기자라는 사람의 글인데(아래 펌), 아주 좋다. '루저 대란'의 파장에 휘둘리면서 또 다른 한 명의 여성으로서 누구나 하는 그런 지겨운 변호과 질책의 변을 되풀이하는 그런 글이 아니라, 요즘 젊은이들에게서 쉽게 찾아지는 '당당함'의 이면에 숨어있는 함정에 대한 '부드러운 고발'이다. 신세대적 당당함이 '루저 대란'을 낳았다면, 잠시 그 '당당함'을 조금만 해부해보자는 것이다.
당당함과 용기를 특권으로 누려야 할 청춘들에게, 험한 신자유주의를 거치면서 어른들이 물려준 삶의 교훈이라는 것이 소위 '성공제일주의' 였는데, 결국은 그것이 "뻔뻔한 유전자"로 돌연변이 돼어 나타나고 말았다는 진단이다. 그런데 돌연변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게, 대통령이고 장관이고 대학교수고 간에 사회지도층에 있다는 놈들이 웬만한 범법과 부정 정도는 당연시하며 뻔뻔함을 모범으로 보이니, 문제는 그런 유전자를 물려준 것은 바로 '어른들'이기 때문이다.
'미안하게도 나는 뻔뻔한 유전자를 물려주지만, 그 유전자를 건강하게 조작하고 개조할 책무는 너희에게 있다'는 요청은 젊은이들에게 너무 지나친 것이겠지만, 달리 방법이 없으니 이제는 젊은이들이 그 뻔뻔함으로 '어른들'을 부정하고 그들의 '인생철학'에 반역하고, 세상의 좀 다른 진리에 용감히 맞서 스스로 찾아가야할 때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내맘대로 다시 풀어본 거친 정리보다는 아래에 옮기는 여성 기자의 말씀과 문장이 훨씬 아름답다. 참조: [사내 칼럼] 한겨레 프리즘: http://www.hani.co.kr/arti/SERIES/157/)
[한겨레프리즘]
‘루저’보다 더 무서운 것 / 김경애 사람팀장
루저의 난, 루저대란, 루저녀, 루저퀸, 루저 티셔츠, 루저대책위원회 …. ‘키가 180㎝보다 작은 남자는 루저(낙오자·패배자)’라는 한 여자 대학생의 발언이 몰고온 이른바 ‘루저 광풍’이 거세다. 공영방송의 교양 프로그램에서, 그것도 전세계 곳곳에서 온 외국인 여성들 앞에서 터져 나온 발언인 까닭에 비난 여론은 어느 때보다 뜨겁다.
‘마녀사냥’을 우려할 정도로 지탄이 쇄도하자 당사자는 ‘해명성 사과’를 했고, 방송사는 해당 프로그램의 제작진을 모두 바꿔 무마를 시도했지만 파문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언론중재위원회에는 방송 이후 12일 동안에만 무려 246건의 손해배상 청구 조정신청이 들어왔고, 이 발언 때문에 정신적인 피해를 입었다며 최저 10만원에서 최고 38억2000만원까지 배상을 요구하고 있단다. 승소할 가능성은 희박하다지만 아무튼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한국적 사건’으로 기록될 모양이다.
손석희 교수를 비롯 사회 유명 인사들이 “나도 루저”, “우리는 모두 루저”라며 커밍아웃 아닌 커밍아웃까지 하면서 ‘루저’는 올해의 유행어를 넘어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자리할 조짐이다.
그럼에도 뭔가 개운찮은 느낌이, 한 달 넘도록 가시지 않는 요즘 감기의 잔기침처럼, 사라지지 않는 것은 왜일까.
직업상, 습관상 공중파 프로를 제시간에 맞춰 보는 ‘본방사수파’는 전혀 아니지만, 우연찮게도 그날 그 프로를 지켜봤다. 제목부터 ‘미녀’를 내세운데다 출연자들의 차림이 너무 화려해 일찍이 외모지상주의, 선정주의를 부추긴다는 비판을 받아온 ‘미수다’는 그날 아예 여러 대학의 ‘대표 얼짱’들을 초대손님으로 출연시켜 외모와 관련된 화제에 집중했다. 한국 초대손님들은 외국 미녀들과 하나같이 다른 의견, 도발적 주장들을 당당하게 쏟아내 보는 내내 불편했다.
사실 김연아와 박지성을 낳은, 한국 젊은 세대들의 당당함은 세계가 부러워하는 자질이다. 하지만 때로 자신이 하는 말의 뜻이나 파장, 상대방의 반응, 심지어 대놓고 비판을 해도 전혀 개의치 않는 태도는 당당하기보다는 뻔뻔할 정도다. ‘모나면 안 된다’며, 겸손과 부끄러움을 미덕으로 배우며 자랐던 지난 세대와는 분명 다른, 그들의
‘뻔뻔 유전자’는 누가 심어준 것인가. ‘공부만 잘하면 된다’, ‘최고가 돼야 한다’, ‘지면 안 된다’고 내몰아온 부모들의 성공제일주의 탓은 아닐까.
되짚어보면, 이런 풍조는 이른바 외환 위기의 파고 속에 ‘쪽박과 대박’의 부침을 겪으며 노골화된 듯싶다. 자본주의의 냉혹함을 체감하면서 명분과 체면을 벗어던지고 ‘돈이 좋다’ ‘부자 아빠가 좋다’고 내놓고 말하기 시작했고, ‘범생이’나 ‘바른 생활 사나이’란 말이 놀림용이 된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지난 대선에서 수많은 비리 의혹과 거짓말 시비를 외면한 채, ‘도덕성’보다는 ‘아파트값’을 택한 다중의
‘뻔뻔 심리’는 지금 ‘실용정책’이란 정치적 수사를 입고 날로 기세를 떨치고 있다. 결혼 전 버린 자식으로부터 친자 확인 소송을 당해 국회에서 해명까지 하는 망신을 산 현직 장관은 ‘부적절한 처신이었으나 불법은 아니다’라며 꿋꿋이 항소를 진행하고 있고, 대통령 선거 참모 출신의 ‘낙하산 공영방송 사장’은 뒷문으로 출근해 어둠 속에서 ‘도둑 취임식’을 하고서도 의기양양하기만 하다. 하기야, 4대강 사업으로 방방곡곡을 파헤치고, 세종시 뒤집기로 온 나라 민심을 들쑤셔놓고도 ‘나 몰라라’ 과속주행만 하고 있는 대통령의 내공에 비하랴.
‘한국 부모의 교육열 따라잡기’를 독려하고 있는 오바마에게 왠지 미안한 생각이 드는 건 어쭙잖은 자격지심일까.
김경애 사람팀장
ccandori@hani.co.kr, 기사등록 : 2009-11-26 오후 10:39:50 ⓒ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39006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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