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12일 월요일

[기억] 10·27 法難 / 釜中之魚 (김상수 칼럼)

10·27 법난(法難), 그 치욕을 벌써 잊었는가?
[김상수 칼럼] 끓는 솥 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들이여(釜中之魚)
기사입력 2010-04-12 오후 12:01:51

 

명진 스님의 일갈(一喝)

봉은사 직영 사찰 전환 외압 논란을 두고 봉은사 명진 주지스님이 어제 일요 법회에서 밝힌 사실들은 그동안 미루어 충분히 침작한 그대로였다. 이는 권력핵심부인 청와대와 조계종 자승 총무원장을 중심으로 한 수하 승려들의 권력거래와 밀통(密通)이 백일하에 드러났음을 의미한다.

명진스님은 "대선 직전 자승 원장은 조계종 중앙종회의장 신분으로 이명박 장로와 함께 힐튼 호텔에서 회동도 했다"며 "그 자리에서 자승 원장은 '대통령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자'고 건배 제의를 했다.

이게 중이 할 짓인가" 라고 일갈했다.

 

민생의 도탄에 침묵하는 불교계 상층부의 오불관언, 다 이유 있었다

바로 그랬다. 시시각각 밤낮으로 '4대강 죽이기'로 흙탕물을 개어내며 마실 물을 망치고 국가 국토의 생명생태계를 박살내고, 생활터전을 지키겠다는 용산시민을 향해 폭압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등, 수없이 무참하고 다급한 현실인데도 왜, 불교계가 그간 소극적이었는지, 시민이 갖은 어려움에 빠져 고통을 호소하지만 왜, 불교계 상층부는 오불관언으로 외면하고 있었는지, 결국 이명박 집단의 정권과 밀통하는 사정이 있었으니 그럴 수밖엔.

 

불가(佛家)는 지금 10.27 법난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가

지금 한국은 시침(時針)을 거꾸로 돌리는 일이 매일같이 다반사다.

30년 이전인 1980년, 전두환 군사반란 세력이 광주시민들을 무참하게 학살하고 국가권력을 강탈한 이후, 바깥 껍데기는 기독교를 표방하지만 내용이나 실상은 어려운 처지에 놓인 대중들의 고환(苦患)을 짜내 사리사욕에 빠져있던, 철저하게 반기독교적인 대형교회 목사들, 그리고 일부 얼빠진 불교계 승려들까지 나서서 서울 시내 호텔에서 교회에서 절간에서, 전두환을 위한 예의 '구국조찬기도회'라는 '쇼'를 열곤 했다.

 

민을 배반한 30년 전 일부(一部) 불가의 파장은

기독교를 표방하면서 세상 권세에 상습적으로 빌붙어 돈을 챙기고 욕심을 챙기는 반기독교 대형교회들 목사들이야 원래부터 생리가 그렇다 치지만, 일부 승려들이 불법한 군부권력에 아부하고 기생하는 태도란, 당시 눈뜨고 있던 민중들에게는 충격이었다.

민중들이 절 문을 발로 차고 침을 뱉고 절 문 앞에 소변까지 보면서 권력에 빌붙는 '기생불교'라고 욕을 해대는 건 당연지사였다.

스님들이 '그게 아니다. 일부 승려들이 그러는 것이다'라고 해명했지만 민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그도 그런 것이 역사 면면하게 민중들과 같이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한국불교가 정작 민중은 전두환 총칼에 살육(殺戮)을 당하고, 삶은 진구렁이나 숯불과 같은 도탄(塗炭)에 빠져 몹시 고통스러운 지경인데, 민을 살피고 민을 일깨워야 할 불가가 도리어 군사반란독재자인 전두환을 찬양하는 행태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다.

 

불가와 민의 괴리를 조작하고 이 틈새를 파고든 부당한 권력

일반 민중의 마음은 크게 상처받았고 불가 일부의 배신감에 몸을 떨어야 했다. 이 때 민중은 불교계와 거리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당시 불안한 권력을 놓치지 않겠다고 오리무중 권력을 만들어나가고 있던 와중인 전두환 신군부세력은 영악하게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민중과 불교계의 괴리, 이 틈새를 비집고 전두환 세력은 1980년 10월27일 새벽 4시, 전국의 사찰과 암자 5천731곳을 경찰과 군대까지 동원하여 일제히 수색하면서 권력에 고분고분하게 협조하지 않는다고 밉보인 대한불교조계종(조계종) 총무원장 월주스님과 불교 관련 인사 153명을 군보안대로 강제 연행하고 고문한다. 이것이 '10.27 법난'이다.

 

2000년 불교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모욕

전국의 사찰들이 군홧발의 신음에 빠졌다. 군홧발로 법당을 난입한 경찰과 군인들은 모든 스님들을 법당 앞으로 모이게 하고 줄을 세웠다. 나이 드신 조실 스님까지 줄에 세우라고 명령했으니 스님들은 너무나 황당하고 무례함에 분노를 떨었지만 군홧발로 스님들을 밟고 소총 개머리판으로 때리면서 폭언을 일삼으니, 총칼의 서슬과 갑작스런 침입에 뭘 어찌할 수가 없었던 스님들은 수사기관으로 붙잡혀가 무릎을 꿇리고 각목을 무릎사이로 집어넣고 무릎 누르기, 새끼손가락에 볼펜을 끼워놓고서 누르기, 입과 코에 고춧가루와 빙초산을 섞은 물 붓기, 물고문, 전기고문, 잠 안 재우기 등 온갖 가혹행위를 당했다. 당시 계엄군에 끌려간 스님 중 많은 수가 무차별한 폭력과 고문으로 시달렸고 목숨까지 빼앗긴 스님도 있었다.

당시 군부는 유랑잡승과 불순분자, 군 기피자를 색출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진짜 속내는 그 때까지 국민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5·18 광주학살로 인한 민심동요의 조짐을 빨리 다른 곳으로 돌리고, 스님들이 사회민주화 운동가들과 연합해 저항세력으로 성장할 우려가 크다고 인식하면서 불만세력에게는 무자비한 철권통치를 확고하게 보여주겠다는 전두환 세력의 거침없는 태도가 2000년 불교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불가에 안긴 것이다.

 

전두환이 '참선'을 운운하는 무인지경에 불가는

1980년 12월11일 당시 정화중흥회의 의장 등 승려 8명을 청와대로 초청한 전두환은 대통령이란 계급장을 찬탈하고 앉아서 문답형식의 대화를 승려들과 나눈다. 당시 전두환은 "종단정화가 빨리 종식되어 국민정신계도에 앞장서 달라" 면서 "절은 참선 등 수행하는 곳인데 어떻게 깡패들이 서식할 수 있느냐" "내가 서돈각 박사를 잘 아는데 서울대 총장할 사람을 동국대가 데려가서 재단분규로 욕보이게 했으니 종단 및 재단 분규는 다시 없기를 바란다"는 등의 발언을 한다.

단군이래로 제일 큰 도둑질을 한 전두환이가 스님들을 부도덕한 도둑놈 무리로 만들면서 '참선'운운한 것이다. 그러나 불가는 숨죽이고 더러운 모욕을 인내할 수밖에 없었다.

 

30년이 지난 오늘, 또 다른 권력의 추잡한 회유와 협박이

어제 명진 스님은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봉은사 외압은 모두 사실이다'라고 말한 김영국(전 조계종 총무원장 종책특보, 현 조계종 불교문화사업단 대외협력위원)씨의 기자회견을 막기 위해 "이동관 청와대 홍보수석이 직접 나서 회유·협박했다"며 "이를 거부하자 입에 담을 수 없는 쌍욕을 했다" 면서 "이렇게 더럽고 추잡한 회유와 협박을 하는 걸 보면 이명박 정권의 말로가 어떻게 될지 지극히 염려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이동관 수석은 11일 오후 미국 출국에 앞서 보좌진을 통해 "이미 밝혀듯이 김영국씨와 통화한 적이 없다"며 "그런데도 왜 터무니없는 발언이 나오는지 모르겠다"고 명진 스님의 폭로를 부인했다. 한나라당 원내대표 안상수가 "전혀 명진 스님 퇴진 압력을 가한 일이 없었다. 명진 스님을 잘 모른다" 고 부인했던 것과 그대로다. 바로 내일이면 드러날 거짓말도 눈빛하나 깜짝 안하고 둘러댄다. 바로 이 정권의 생리다. 그리고 툭하면 법대로 따진단다. 청와대 홍보수석실 이 "해당 발언이 어떻게 나왔는지 따져본 후 법적인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힌 게 바로 그렇다.

 

부중지어(釜中之魚)

"너희들이 지금 아무리 세력을 떨치며 살지라도 이러한 행태는 마치 끓는 솥 속에서 헤엄을 치는 물고기와 같아,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또 "죄 지은 자는 솥 속의 물고기와 같다"

비리와 부패를 발판 삼아 세상을 휘젓는 자들에 대한 경고가 팔팔 끓고 있는 솥 속의 물고기다, 한기(漢記)에 나와 있는 고사로 '부중지어'다.

끓는 솥 속의 물고기는 아무리 설쳐대도 오래가지 못한다는 이 단순한 진리가 정치권력에 기대는 조계사 총무원장과 수하 승려들, 그리고 밀통의 상대인 이명박 집단의 정권 처지이다.

이 나라 국민들의 정신은 지금 점점 사나워지고 있다. 국민들은 마구 헷갈리고 어지러워한다. '4대강 죽이기 사업'만 해도 이명박 집단은 국민을 계속 속이고, 강 따라 사는 일부 국민들은 돈 때문에 더 미치게 만들고 있다.

이렇게 국민들을 어지럽게 하는 정권이란, 이쯤이면 병입고황(病入膏肓)이다, 몸 깊은 곳에 병이 들었으나 긴 바늘 침이 미치지 못하므로, 병을 아예 고칠 수도 없다. 이런 지경이면 갱무도리(更無道理)다. 다시는 어쩔 도리가 없다는 얘기다.

불가 식으로 얘기해서 '대갈통에 벼락이 떨어져'도 이미 늦었다.

지금 많은 시민들은 꼭 불교도가 아니더라도 조계사 총무원장 자승의 침묵에 대해 묻고 있다.

자승이 믿는 불교란 어떤 불교인가? 흔히 말하기를 불교의 가르침이 잡다하게 많은 이유가 대중들의 번뇌가 복잡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들을 한다, 그러나 한국의 불교에는 공통의 원리가 있고, 있었다. 비록 대중이 헷갈리는 건 그렇다 하더라도, 불교의 수행이라면, 그 잡다한 속에서도 무엇인가를 줄곧 찾았다. 계율이나 어려운 이론이 아니었다. 불교에선 이를 '정리'(整理)라 했다.

이 '정리'는 이도저도 아닌 뒤죽박죽에 명리(明理)를 밝히는 기본이었다. 이 기본은 그저 삶을 살아서 이어나가야 하는 사부대중의 의지에 절실하게 다가선 것이었다. 한국 불교 역사가 대중 속에 들어감으로써 오래도록 살아남았던 것도 이것에 연유한다. 인간의 평등을 전제로 특정 계급의 불교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였고 현실적으로 고통 받는 민중들에게 불교는 다가갔기에 한국역사 속에 2000년 불교역사였다.

 

법복이 너무 무거우면 벗어야

이 '정리'는 토막을 내어 편을 가르는 게 아니다. 번뇌를 가르는 중심으로 중(僧)의 면목이다. 이에 미치지 못한다면 가사(袈娑)를 벗어야 한다. 장삼 위에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 밑으로 걸쳐 입는 중의 법복이 너무나 무거워 보인다.

오늘 한국의 불가는 이런 상황에서 행법(行法)의 원리인 '발심수행(發心修行)'의 결단을 할 때이다. 1300년도 훨씬 이전에 원효(元曉)스님이 불가 후손들에게 권한 방식이다.

행위, 언어, 사유의 방식에 따라 인지되는 것에 대해 스스로 자신을 반듯하게 드러내어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행법은 인격(人格)이자 몸으로 하는 법신(法身)이다, 그리고 아미타불이다.

원효는 중생과 부처를 나누지 않았다.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에 일방으로 희생당하는 민중의 고통을 구원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부처를 맞이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또한 사회의 모순 구조를 변혁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민중들의 삶에서 종살이를 혁파시켜야 한다고 했다.

전국에 있는 절간에서 석가모니 부처 사상의 뿌리가 일체 만물이 본래 평등하다는 석가모니의 자각에서 시작되었음을 다시 거듭 일깨움이 원효의 화쟁(和諍)이다.

따라서 중생(衆生)을 위난(危難)에서 구함이, 이를 실천하는 노력이 곧 불교임을 말한 것이다. 부처님이 행하고 가르친 자비와 구제의 대상을 바로 오늘의 시대와 사회에서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가 예각(銳角)으로 시퍼렇게 날이 섰다.

도저히 불가는 오늘 이 지경인 현실을 어떻게 비켜갈 도리가 없지 않겠는가.

결국 한국의 불가는 오늘 현실에서 결단을 내려야 할 때다. 괴(傀)한 중은 스님이 아니다. 스님이 아닌데 가사를 걸치고 흉계(凶計)나 꾸미며 세상과 사부대중을 계속 어지럽힌다면, 불가의 엄격한 규율은 물론이지만 역사속에 멸(滅)을 거부하고 생(生)을 추구했던 불가의 다음 수순은 과연 무엇일수 있는가?

명진 스님에게 지금 불가는 온전한 힘을 모아드려야만 할 때다.
 

/김상수 작가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00412114817&section=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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