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29일 목요일

[천안함10]"각하, 한 번 더 우셔야겠습니다" (김상일)

결국은 [천안함]이 10번까지나 왔다. 정말 이번이 마지막이길 바라며...

 

 

 

"각하, 한 번 더 우셔야겠습니다"

[세기와 더불어]의 세계화 담론 (72) / 김상일 (전 한신대 교수)

 

 

대통령의 울음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을 읽노라면 왜 그렇게도 우는 장면이 많은지. 신약 성경을 읽노라면 예수가 웃었다는 곳은 없어도 울었다는 장면은 나온다. 최근 명진 스님의 흠을 잡는 가운데 스님이 노무현 대통령 추모식에서 우셨다는 것을 흠집으로 잡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왜 지도자가 웃는 것은 괜찮은데 우는 것은 문제가 되는 것인가? 그리고 어떤 울음은 보기가 좋은 데 어떤 것은 흉스러운가? 그러면 지난 번 이명박 대통령의 울음은 전자인가 후자인가?

드디어 이명박 대통령이 우셨다. 취임 후 처음 흘린 눈물 같다. 그런데 이 눈물이 지금 시중의 사람들 가운데 회자가 되고 있다. 이 번 천안호 침몰 사건으로 우리는 사건과 연관이 된 별 난 것을 한두 가지 보았다. 하나는 실종자 수색을 가족들의 동의를 군 당국이 받아 드려 중단하기로 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이명박 대통령의 우심이다. 이 두 가지 건들이 별 중요하지 않는 것 같아 보이지만 이는 보통 집고 넘어 가서는 안 될 문제이기도 하다.

먼저 건부터 한 번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이 건을 알기 쉽게 이해하는 방법은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 와 비교 대조해 보는 것이다. 포로로 잡힌 일병 한 명을 구하기 위하여 장교 한 명을 포함한 무려 8명의 군인들이 죽거나 부상을 당한다. 그러나 끝내 라이언 일병을 구하고 만다는 미국식 가치관이 그대로 반영된 전형적인 할리우드 식 영화이다. 지난 번 이라크 전쟁 때도 유사한 한 여병사의 무용담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비록 허구로 드러나기는 했지만 미국이 실종 병사와 포로병을 구하기 위해선 어떤 희생을 치룰 수도 있다는 연극 같은 구출작전을 천안호 사건과 연관해 한 번 생각해 보자. 한국적 가치는 무엇인지 비교해 알기 위해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천안호 사건

이 번 천안호 사건 때 천안호 가족들은 한준호 준위의 죽음, 그리고 금양호 선원들의 실종 사고가 발생하자 말자 수색을 중단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군은 잽싸게 감사하다고 했고 온 국민들도 이를 환영할 것이라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순간 전혀 환영하지 않았다. 환영하기는커녕 우리 사회에 철학이 없구나 인간을 보는 눈이 없구나 하고 개탄을 금할 수 없었다.

지난 1998년에 나온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보면,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위해 오마하 해변에 대기하고 있던 미군 병사들 가운데는 한 가족 4형제가 함께 있었다. 이중 3명은 이미 전사한 상태. 밀러 대위는 실종된 유일한 생존자인 막내 라이언 일병을 구하기 위해 미 행정부의 특별한 임무를 맡게 된다. 단 한명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여덟 명이 위험을 감수해야할 상황에서 대원들은 과연 라이언 일병 한 명의 생명이 그들 여덟 명의 생명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인지 끊임없는 회의와 함께 심리적 혼란에 빠진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특명을 내리고 밀러 대위는 지휘관으로서 작전을 끝까지 책임지고 부하들을 설득한 후 대원들을 이끌고 라이언 일병이 있다는 곳으로 향한다. 마침내 극적으로 라이언 일병을 찾아낸다.

할리우드에서 만든 전쟁영화 치고 이 만큼 흥행에 성공한 것도 없다. 톰 행크스를 비롯해 맷 데이먼, 반 디젤 등 할리우드의 대표스타들이 출연한 영화가 요즘 천안호 사태가 나자 갑자기 영화 장면 하나 하나가 머리 속을 스쳐 간다. 라이언 일병 구출하는 과정에서 미군이나 정부당국이 그의 가족들에게 희생이 너무 따르니 구출 작전을 중단하는 게 좋지 않으냐고 문의한다는 장면을 영화에서 본 적이 없다. 끝내 밀러 대위와 다른 대원 하나는 죽고 나머지 구출대원들도 부상을 당한다. 영화를 보면서 한 사람을 구하려 왜 저렇게 희생을 치러야 하는지라는 의문이 든다. 그야 말로 비실용적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였다. 정부가 실종된 자기 나라 한 병사를 구하는 것은 의무이지 희생자 가족의 동의를 구하고 안 하고 할 요청의 사안이 아니라는 것이 미국식 가치관이다.

아니 대한민국을 제외한 지구상 모든 국가들의 가치관일 것이다. 뒷말로는 군 당국이 천안호 가족에게 반 강요를 했다는 것이다. 국가는 가족들이 요청을 했어도 자기가 해야 될 의무에 충실했어야 할 것이다. 군과 국가가 가족들의 동의를 구하는 태도에 이의를 제기 하지 않고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는 우리 국민들의 보편적 정서에 나는 경악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아니 군당국이 설령 그런 조치를 취했다고 하더라도 대통령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지시했어야 한다고 본다. 언제부터 이렇게 인간의 생명을 실용이라는 잣대로 평가하게 되었는가에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할리우드 영화를 본 때문일까. 아니다. 전지구상 어디도 이런 경우는 없을 것이다.

한 마리 잃은 양을 찾는 이유

신약 성경에 보면 한 마리 잃은 양을 찾기 위해 나머지 99마리를 내 팽개쳐 두고 산과 들로 방황한다는 비유 설화가 나온다. 불교 경전에도 유사한 설화가 있다. 듣기에 따라서는 좀 비합리적이고 비실용적인 것 같다. 성경이 왜 그런가에 대한 이유는 요즘 사회적으로 문제시 되고 있는 안락사와 견주어 한 번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다 죽어가고 반드시 죽고 말 한 인간의 생명을 위해 고가의 병원비를 지불해가면서까지 생명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것이다. 핑계는 환자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이 더 고통스러울진데 차라리 가족들 동의를 받아 산소 호흡기를 때어 버리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겠느냐 이다. 그러나 세계 모든 나라에서 안락사 논쟁이 있지만 아직 끝나지 않는 미제의 건으로 남아 있다. 지난 번 김 할머니를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산소 호흡기를 떼면 금방 돌아가실 줄 알았는데 몇 날을 더 사셨다.

물 속에 수장되어 67시간을 넘겨 살아 있을 희망도 없는데 구태여 구출 작업하다가 산 사람 더 희생 시킬 필요가 있느냐고 할 것이다. 그러나 했어야 한다. 반드시 했어야 한다. 예수나 부처님이 판단력이 모라라서 아니 비실용적이라서 99마리 양을 희생해서라도 한 마리 실종된 양을 찾으라고 했겠는가? 여기서 그 이유에 대하여 더 설명을 하면 사족이 될 것이다. 천안호 실종자 더 수색을 안 한 것이 천안호가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갖는 의미보다 더 중요하다. 정치도 군대도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다. 인간이 그것을 위해 있어서는 안 된다. 바로 이것이다. 실종자 수색을 중단한 것은 그 생명의 수자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가치관의 전도, 이것이 큰 문제라는 것이다. 정치적인 이유로 안보상의 이유로 하나의 생명을 헌 신짝 같이 처리해 버리고 처치해 버리는 태도 말이다.

연쇄 죽음이란 죽음의 도미노 현상을 어떡하나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터지는 사건마다 연쇄 사망사건이다. 용산참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용산 철거민이 죽자 이어서 경찰이 따라 죽고, 천안호 소속 해군 장병들이 죽자 이를 구하려던 한준호 준위와 금양호 선원들이 따라 죽고. 이렇게 연쇄 작용으로 죽은 생명의 수자가 이명박 정부가 들어 선 이후 무려 67명에 이른다고 한다. 심지어는 노무현 대통령이 죽으니 김대중 대통령이 3개월 간격으로 따라 죽고.

예수와 부처가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머지 양들을 버리고 떠나는 이유도 바로 한 생명을 무시하면 ‘죽음의 도미노 현상’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 그 한 생명을 귀중하게 여겨야 했던 것이다. 이명박과 그의 정부는 이미 죽음 증상 자체에 무감각해진 사이코 패스 말기 증세에 도달해 있는 것 같다. 앞으로도 얼마나 더 많은 인간들이 이 정부 밑에서 죽음이 죽음을 부르는 도미노 현상을 부를지 아무도 모른다. 당장 나일 수도 있고 당신일 수도 있다. 한 사람의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긴다는 말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한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다는 것은 곧 모든 생명을 그렇게 한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이 번 천안호 사건으로 정부가 우리에게 보여준 태도는 한 인간의 생명이 개죽음 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려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성림의 주검을 끝까지 찾아내 울다

김일성 유격대의 제 1차 북만 원정 당시 단산자 부근 전투에서 전령병 이성림이 희생되었다. 일본군과 정안군의 맹렬한 협공을 받고 있을 때 김 사령의 명령을 전하려고 이성림이 평남양 부대로 달려가다가 불의에 적과 조우하여 전사하고 말았다. 김 사령은 적과 끝까지 싸우고 시신을 찾아낸 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성림을 안고 얼마나 울었던지 평남양 부대마저 소리를 내여 슬프게 울게 됐다. 적을 쳐 물리치고 승리한 전장에서 리성림의 시신을 발견했을 때 내 눈앞에 맨 처음으로 떠 오른 것은 그가 단골방처럼 발이 닳게 찾아다니던 왕청 아동단 학교였다. 그 학교에는 리성림의 소꿉동무들과 죽자 살자 하면서 지내온 친구들이 많았다. 내 이제 성림이를 북만 땅에 파묻고 왕청 아동단원들 앞에 무슨 면목으로 나타나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니 저도 모르게 목이 메고 눈물이 괴여 올랐다. 전우들이 언 땅을 파고 리성림의 시신을 안장하자고 할 때 그가 다시 살아나 나의 품에 안기는 것 같아서 언 흙을 파 얹지 못하게 하였다. 박달같이 언 차디찬 땅속에 그 어린것을 두고 간다고 생각하니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성림은 소년병으로 잘 때에 김 사령의 목을 안고 잤다는 일화가 있다.

전령병 하나의 죽음이라도 끝까지 찾아내고 편안한 곳에 무덤을 만들어 주는 것이 김일성 항일 유격대의 불문율이었다. 해방이 된 다음에는 이들의 무덤을 일일이 확인해 시신을 대성산 혁명 열사릉에 안장하고 이들의 흉상을 일일이 만들어 주었다. 무려 300여기나 된다고 한다.

천안호에서 마지막으로 시신으로 발견된 박성균의 어머니는 아들보고 군대에 가라고 한 말을 후회하면서 통곡을 하였다. 이 번 나라가 보여준 태도를 본 젊은이들이 군대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누가 하겠는가? 어느 부모가 자식을 군대 보내고 싶어 하겠는가? 이 사실을 미리 터득한 대통령과 그의 각료들이 병역을 기피했는가 보다. 처세에는 달인이니깐.

김일성 부대의 경우, 두 딸을 가진 어머니가 딸 모두를 유격대원으로 들여보내면서 “이 어머니는 자식들의 봉양을 바라지 않는다. 나라도 찾지 못한 주제에 효도가 다 무어냐. 너희들이 이 에미를 돌보지 않아도 나는 얼마든지 살아 갈 수 있다. 그러니 너희들은 둘 다 이 달음으로 유격대에 들어가거라”고 말하는 일화가 전한다. 1934년 봄 지휘부직속 재봉대로 편입한 한성희 자매의 얘기다. 어떤 때는 어린 소년대원들이 유격대를 따라 나서 그것들을 떼어 놓느라 진땀을 빼는 장면도 보인다. 12~3 세 정도의 어린 소년들이 유격대를 따라 나섰다 자기 집에서 점점 멀어지자 엉엉 울면서 집에 되돌아가겠다는 진풍경도 벌어진다.

이런 소년병들이 자라 해방이 될 때는 30대가 되었다. 초대 국방장관 강건도 소년병 출신이고, 전문섭과 이을설도 모두 소년병 출신들이다. 김 사령은 이들을 안아 키우고, 글을 가르치고, 자기 옷을 벗어 입혀 키워 해방 후 나라의 동량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이 이런 나라를 향해 “정신 좀 차리라”고 했으니 어리둥절할 뿐이다. 누가 누구에게 해야 할 말인지 모르겠다. ‘어버이 수령’ 이란 말이 해방 후 지어 강요된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부디 알기 바란다. 북을 보는 시각을 바꾸어도 많이 바꾸어야 한다. 대통령은 지금 이 시간부터라도 적장의 회고록은 읽고 나서 정사에 임해 주기 바란다.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란 말이 있지 않는가?

각하의 눈물의 진실을 의심하는 이유

4월 21일 천안호 침몰 후 가진 첫 특별 담화에서 대통령은 눈물을 흘렸다. 죽은 장병들의 이름들을 하나하나 호명 하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대통령의 눈물에 진정성이 있느냐 없느냐는 지금도 시비가 설왕설래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악어새의 눈물’이라고 까지 한다. 남의 눈물의 진정성과 비진정성을 논한다는 것은 그것도 대통령의 그것에 대하여 시비한다는 것은 무례해 보일지 모르겠다.

우리가 객관성을 가지고 대통령의 우심에 시비를 걸자면 그의 눈물 자체를 도마에 놓고 아무리 분석해 보았자 결론이 쉽지 않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분명히 대통령의 눈물에 의심을 던질 수밖에 없는 ‘보이지 않는 그림’이 하나 있다. 그것은 천안호 사망 혹은 실종자 뿐만 아니라 이들을 구하려다 죽은 한준호 준위, 그리고 금양호의 돌아오지 못한 선원 7명의 이름들이 대통령의 호명에서 빠진 것이 그 그림에 해당한다. 이 누락은 간단한 것 같지만 대통령이 우리 국민들을 바라보고 있는 시각의 문제와 연관이 되기 때문에 여사히 넘겨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우리 국민들은 이 보이지 않는 그림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유교적 관념으로 왕과 백성은 부모 자식 관계와 갔다고 거창한 이론을 제시하지 않더라도 어느 한 가정에서 한 자식은 물에 빠져 죽고 다른 자식은 구하려다 죽었다고 가정해 보자. 어느 부모가 과연 물에 빠져 죽은 자식만을 위해 울고 다른 자식을 위해서는 울지 않을 것인가?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라는 말 그대로 만약에 이명박 대통령이 우리 국민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대국민 방송을 하려 나왔다면 천안호 때문에 죽은 모든 사람들을 호명하며 울었어야 할 것이다. 천안호로 인하여 생긴 모든 희생자들이 한 눈에 들어 왔어야 한다. 그런데 대통령의 눈에는 금양호 선원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 이유는? 그 이유는 간단하다. 금양호 선원들은 정치적으로 이용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민중의 소리는 ‘MB, 당신의 눈물이 진실이라면’이란 제하의 글(4.21)에서 대통령까지 외면한 금양98호 선원들의 죽음을 ‘의로운’ 죽음이라 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천안호 선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면서 “여러분이 마지막 순간까지 나라를 걱정하고 가족을 걱정하며 서로 너만은 살아남으라고 격려했을 때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우리를 믿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편히 쉬기를 바랍니다”라고 했다. 나는 대통령이 금양호 선원들도 호명하지 않을까 혹시나 싶어 끝까지 기다려 봤지만 금양98호 선원들의 이름은 한 사람도 호명되지 않았다. 글을 쓴 기자도 나와 같은 심경을 토로하면서 “한평생 남의 눈치를 보며 살다가 누군가를 위해 목숨까지 잃은 그들의 한은 누가 풀어줄까. TV를 끄면서 생각했다. 대통령의 눈물에 진정성이 있는 것일까”고 지적했다.

대청도 해역은 암초가 많고 조류가 거센 탓에 평소 저인망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다. 금양 98호 선원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도움을 청하는 군을 위해 선뜻 바다로 떠났다. 그들 중에는 6개월에 한 번 맞는 귀중한 휴가도 반납한 선원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용기와 헌신은 천안함 사건에 가려졌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해 자기의 아까운 목숨을 바친 선원들이야 말로 참된 삶을 산 영웅들이다. 이들의 의로운 희생이 외면당하면 앞으로 누가 남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바칠까. 이명박 대통령의 눈물이 진실이라면, 타인을 살리려다 죽은 금양호 선원들을 외면해선 안 된다. 비참한 죽음이 되도록 이대로 방치하면 안 되는 것이다."(민중의 소리 기자의 말)

대통령이 부르지 않은 그 이름, 정부가 외면한 이름을 불러주고 싶다. 대통령과 정부가 진정 기억해야 할 그 이름들이다. 대통령이 안 불러 준 이름 우리들이라도 불러 주자. 김재후 선장, 박연주 기관장, 이용상 선원, 안상철 선원, 김종평 선원, 정봉조 선원, 허석희 선원, 유수프 하레파 선원, 람방 누르카효 선원.

아직 늦지 않았다. 대통령은 다시 나와 눈물을 흘려야 한다. 이때에는 반드시 지난 번 담화에서 호명하지 않은 것에 대한 이유도 설명을 하고 그 가족들을 위로하는 말도 해야 한다. 예수가 십자가를 매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 갈 때에 길옆에 서서 구경을 하다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형장까지 간 제수 없었던 한 사나이가 있었다. 그 사나이의 이름은 루포이다. 이렇게 역사의 현장에는 주변에서 조연을 하다 희생당한 자들이 있다. 그러나 루포라는 이름은 그 이후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

금양호 선원들의 시신은 아직까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상태에서 실종자 수색을 중단하겠다고 한다. 이들 가족들을 위한 모금을 한다는 말도 아직 들은 적이 없다. 그러나 이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안중에 이들은 없었고, 그것보다 더 슬픈 것은 역사에서 이들이 제외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통령 눈물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잣대가 될 것이다. 두 자식이 죽었는데 한 자식만을 위해 어느 부모가 눈물을 흘린다면 누구도 그 부모를 부모로서의 자격을 의심할 것이기 때문이다.

천안호는 현재 진행형이다

한 마리의 양을 찾지 않을 때 어떤 효과가 따르는가 보자. 실종자들을 끝까지 찾지 않을 때에 어떤 효과가 따르는지 보자. 실종자들을 구하려다 죽은 금양호 선원들을 내 팽개칠 때에는 또 어떻고? 살아남은 병사들 그리고 앞으로 군 입대를 하려는 사병들의 심경을 한 번 헤아려 보자. 나도 죽어 실종이 되면 나라에서 저렇게 대우하겠구나. 그리고 괜히 남을 위해 좋은 하려다 저 꼴 날 봐 에야 뭘 남 구하려 물에 뛰어 들 필요가 무엇 하나 있겠는가 하지 않겠는가? 이명박 정부는 이번 천안호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최악의 국민 정서를 형성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지 묻고 싶다. 아직도 천안호 사건은 진행형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지금 이명박 대통령은 이북을 향해 정신 좀 차리라고 했는데 자신을 향해 먼저 했어야 한다. 정신을 차리라고 한 이북은 어떤지 한 번 보자. 살아생전에 김일성 주석은 이런 경우를 당했을 때에 사람들이 아니 인간들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었다. 회고록 속에는 항일유격대원들이 일본놈들 하고 싸우다가 죽은 수많은 사람들의 얘기가 나온다. 유격대원들은 동지들이 전사를 당하면 위 이성림의 경우에서 본 것처럼 반드시 주검을 찾아낸다. 물론 전사한 동지 하나 구하려다 두세 명이 몰살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부상당한 동지를 어깨에 메고 탈출하다 그만 산 자까지 변을 당하는 이야기도 나온다. 부상당한 자가 나를 두고 동지들 빨리 몸을 피하라고 해도 끝까지 함께 탈출한다. 눈 싸인 산 속에서 며칠을 굶다가 산열매를 보면 동지의 입에 먼저 넣어주고 자기가 먹지 자기 먼저 먹는 법이 없다. 이것은 빨치산들의 불문율이다. 이를 김 주석은 ‘신뢰와 사랑’이라고 했다.

홍정자 여사의 ‘내가 만난 북한 사람들’을 보면 미인처녀들이 부상당한 상이군인들과 결혼하려 줄을 서 있고, 간호원들은 산골에 있는 노인이 갑자기 병이 나면 비가 억수로 내리고 눈이 무릎까지 차는 대로 반드시 찾아간다. 지난 번 고난의 행군 때에 가장 많이 아사한 사람들이 노동당 고급 간부들이었다고 한다. 이 내용은 KBS에서도 방송한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도 이런 체제가 하루아침에 무너질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몽상이다. 사랑과 신뢰만큼 강한 무기는 이 지구상에 없다. 이 번 천안호 사건으로 이 나라에 사는 인간들 사이의 신뢰와 사랑이 다 무너지는 것이 천안호 상실에 버금가는 손실이다. 전쟁에서 군민의 상호 신뢰라는 무기를 당할 것이 또 있다고 보는가? 군 발표를 못 믿겠다는 국민이 75%라고 한다. 이러고도 전작권만 안 넘겨주면 살아남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장개석 군대가 왜 망했는지는 알지 않는가?

대통령이시여 이 나라 이 민족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모습을 보여 주시라. 다시 한 번 금양호 선원들 이름 불러 주기 위해 라일락이 지기 전에 방송에 한 번 더 출연해 주시기 바란다. 그리고 다음 번 우실 때에는 눈물을 감추시고 우시라.

‘눈물을 감추어요. 우리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 민족은 울 때에 눈물을 감춘다는 미덕이 있다. 그래서 ‘눈물을 감추어요’란 유행가 가사도 있다. 그런데 지난 번 대통령 담화 때는 눈물을 감추지 않았다. 아니 대국민을 향해 눈을 정면으로 향하는 것이 마치 카메라 앵글에 맞추는 듯하였다. 대통령은 그 날 혼자 우셨다. 대통령이 우시는 것을 보고 국민들도 함께 울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반대로 대통령의 울음의 진정성에 관한 말만 지금 무성하고 있다. 그래서 지난 번 우심은 실패한 우심이다.

만약에 그 때에 금양호 선원들의 이름을 함께 불렀더라면 어느 정도는 성공한 울음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 국민들은 대통령께서 그들의 이름을 부르시겠지 차마 안 부르시지는 않겠지 하며 그날 조마조마 하며 기다렸는데 대통령은 끝내 그들을 외면하고 말았다. 금양호 선원 이름 부른다고 천안호 가족들이 차마 더 실망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도 좋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안 부르셨나요?”

우리 민족이 울 때에 ‘눈물을 감추는’ 이유에 대하여서도 생각해 보자. 그것은 눈물의 공감대를 만들기 위해서이다. 지난 번 같이 대통령이 시선을 카메라 앵글에 맞추고 울면 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같이 흘려줄 수 없다. ‘감칠맛’ 이란 감추는 맛일 것이다. 이런 감칠맛을 못 내기 때문에 서양의 지도자는 좀처럼 아예 울지를 않는다. 아니 울지를 못한다. 울음의 감칠맛을 내는 기교가 없기 때문이다. 입술을 깨무는 정도이다. 911테러 당시 부시 대통령이 뉴욕 현장에 나타나 대중 연설을 할 때에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울 때 고개를 좌우로 돌린다. 눈물을 감추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감추는 행위가 들어 남이다. 사서삼경의 중용이란 책에 ‘비이현 費而顯’ 말이 있다. ‘드러내면서 감춘다’는 뜻이고 이것이 중용이라는 것이다. 울음의 중용지도를 우리 민족만큼 잘 표현 하는 민족도 없을 것이다. 울음도 비이현일 때에 공감대를 자아 낼 수 있다. 이런 중용의 미덕을 대통령의 울음에서 볼 수 없어서 국민들은 아쉬워하고 있다.

회고록에 나오는 지도자와 대중들 사이에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거의가 함께 부둥켜안고 우는 장면들이다. 지도자 혼자서 훌쩍이는 장면은 없다. 우리 국민들은 지금 울고 싶어 한다. 가슴 속에 울고 있다. 자식 있는 부모들 모두 내일 같이 생각하고 있다. 대통령과 정부는 왜 선거용으로도 울음의 공감대를 못 만들어 내는가? 지난 번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 때와 같은 효과를 왜 못 만들어 내는가? 천안호 원인 캐는 것 보다 더 효과가 컸을 것인데 말이다.

그래서 대통령께서는 방송에 다시 나와 울음을 한 번 멋있게 울어 주시기 바란다. 그래서 죽은 천안호 장병들을 위해 한준호 준위를 위해 그리고 금양호 선원들을 위해 대통령과 우리 국민들이 함께 울어 보고 싶다. 그리고 이번에 우실 때에는 눈물을 감추시는 울음을 울어 주시길 부탁드린다. 이 민초들과 여민동락 與民同樂하시며 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바란다. 그래서 천안호 침몰의 원인을 캐낸다고 해서 일이 끝나지 않는 이유를 진정으로 알기를 바란다. 북풍을 아무리 불게하려 하여도 ‘눈물을 감추어요. 우리 서로 사랑한다면’이라는 유행가 가락 앞에서마저 그것은 자지러지고 말 것이다.

 

2010년 04월 28일 (수) 17:40:17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89899#

댓글 1개:

  1.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하자 모택동 주석의 아들 ‘모안영’도 전투에 참가 전사했다. 시신을 중국으로 옮기려는데 모택동이 지시했다. 전사한 땅에 묻으라고. 모안영의 시신은 평안남도 회창군 ‘지원군열사능’에 안장되어 있다고 한다.



    해군사관학교를 나오고 해병대 장교가 된 고등학교 동창이 월남전에 참전 부상을 당하고 훈장 받고 전역했다. 그는 이제 국립묘지에 있다. 그가 생전에 전한 말이다. 전투 중에 소대장이 앞장서지 않으면 절대로 사병들은 뒤따르지 않는다고 한다. 용장 밑에 약졸 없다. 취재차 현충일에 친구와 현충원에 갔다. 어느 묘비 앞에서 오열했다. 바로 자신의 전령 앞에서다. 지뢰를 발견하고 제거 중 저격을 당했다는 것이다. 자기 대신 전사했다고 오열했다. (서프라이즈 / 이기명 / 2010-04-30)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2&uid=139911

    답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