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22일 월요일

"유럽의 연대는 국경선에 멈춰있다"

[분석] 캘리포니아 재정위기와 그리스 재정위기의 차이 / 이승선

 

여러 국가들이 단일 통화체제를 구축했는데, 통합 재정 정책은 없다면 이 단일통화권은 언제 깨질지 모르는 불안정성이 내재돼 있다. 그리스 부도 위기 사태를 계기로 유로존(유로화를 공동통화로 사용하는 16개국)이 바로 이런 취약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최근 <뉴욕타임스>는 유로존 회원국들이 그리스 지원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을 빚는 것에 대해 "그동안 중대한 경기침체가 닥치지 않아 그럭저럭 버텨왔으나 한계에 봉착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신문의 분석에 따르면, 유로존을 미국과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분명해진다. 미국은 연방정부가 소속 주들을 지원할 힘이 있는 반면 유럽은 어려운 처지에 놓인 회원국들을 안정시킬 제도가 없다.

 

그리스 사태, 경제보다는 정치적 문제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10%를 차지하는 캘리포니아 주가 재정 파탄 상태이며, 보다 엄격한 긴축정책이 필요한 상황이지만 미국 경제권이 분열될 것으로 걱정하지 않는 반면, 유럽 GDP의 2%에 불과한 그리스 사태로 유로존의 미래가 의문스럽다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페터슨 국제경제연구소의 선임연구원 아담 포젠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현재까지 그리고 앞으로 얻을 효과에 비해 그리스를 구제하는 비용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사실 경제적으로는 그렇게 크지 않다"고 지적했다. 정치적으로 통합된 연방 수준의 체제라면 그리스 사태가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유럽의 최대 경제대국 독일은 유로존의 태동을 주도하고 이번 사태 해결에 프랑스 등 다른 주요 회원국들과 뜻을 모아야 할 중심국가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의 지원에 난색을 표시하고 있다. 독일 국민의 여론도 차갑다. 그리스를 지원하기로 결정한다는 것은 구제금융을 받으려고 길게 줄을 선 다른 나라들에게도 얽혀들어간다고 보기 때문이다. 독일 주간 <빌트 암 손탁>이 지난 14일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독일 국민의 3분의 2가 그리스의 재정적 지원을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53%가 그리스의 막대한 부채가 유로존의 안정성을 위협한다면 그리스를 유로존에서 퇴출시켜야 한다고 응답했다. 독일 국민의 여론이 이처럼 차가운 이유는 독일도 지금 '제 코가 석자'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통계당국의 최근 발표에 따르면 독일 경제는 지난해 4분기에 제로 성장을 하면서 전년 대비 -5% 가까이 축소됐다. 또한 재정적자와 국가채무가 그리스 수준으로 악화되는 추세에 놓여있다. 독일의 재정적자는 올해 GDP 대비 4%를 넘고 내년에는 6% 등 증가 추세이고, 프랑스도 올해 재정적자가 GDP 대비 7%에 달할 전망이다. 게다가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이끄는 중도 우파 연합은 오는 5월 중요한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어 그리스 지원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의식해 명확한 입장 표명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 ⓒ연합뉴스

 

"유럽의 연대는 국경선에 멈춰있다"

이때문에 <뉴욕타임스>는 "유럽이라는 정체성보다 국가라는 정체성이 얼마나 뿌리깊은 것인지 드러났다"면서 "유럽 대부분 국민들에게 연대는 여전히 국경선에서 멈춰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국민들이 반대한다고 해도 유럽의 경제대국인 독일과 프랑스 등 주요 국가들이 그리스를 지원하기로 합의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유권자의 분노보다 더 무서운 경제적 혼란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구체적인 지원대책을 마련하기까지는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 유럽연합 27개 회원국들은 16일 재무장관회의(ECOFIN)를 갖고 그리스에 강도 높은 적자 감축 방안을 요구하면서도 추가대출이나 지급보증처럼 구체적인 지원 방안은 내놓지 않았다. 전날 유로존 재무장관회의(유로그룹) 내용을 승인한 수준이다. 이에 따르면 그리스는 올해 재정적자를 2009년 GDP 대비 12.7%에서 2010년 8.7%로 4%포인트 감축하고 2012년까지 EU의 가이드라인인 GDP 대비 3% 아래로 내려야 한다. 올리 렌 EU 경제·통화담당 집행위원은 이런 목표는 추가적인 긴축 방안이 없이는 달성하기 어렵다며 그리스를 압박했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EU는 그리스에게 부가가치세 인상과 공공부문 임금 삭감까지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게오르게 파판드레우 그리스 총리는 "수용할 수 없는 무리한 요구"라며 강력 반발하고 있다. 앞서 연료세 인상과 공공기관 직원 급여 1% 추가 삭감안 등으로 그리스 공무원노조 등이 총파업을 단행한 상황에서 추가 긴축은 국내 정치적으로 수용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 그리스 지원 문제를 둘러싸고 유로존이 분열 위기를 겪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유럽, 정치적 통합의 고통스러운 외길 걸어야"

그리스 지원보다 사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유로화의 앞날이다. 최근 유로화 가치는 유로존이 붕괴되어 다시 개별 통화 시대로 환원될 가능성까지 거론되며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뉴욕타임스> 칼럼에서 "유로존 해체는 현실적으로 생각하기 힘든 대안"이라고 단언했다. 개별 통화로 돌아가려다가는 걷잡을 수 없는 금융위기가 터진다는 것이다. 크루그먼 교수는 "유럽 국가들이 미국의 주들처럼 정치적으로 통합되는 길로 나아갈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못박았다. 하지만 이 길이 말처럼 쉽지 않다. 크루그먼 교수에 따르면, 향후 여러 해에 걸쳐 고통스러운 과정이 전개된다. 가혹한 긴축을 조건으로 하는 구제금융, 그것도 힙겨운 디플레이션 속에 지속되는 매우 높은 실업률 이 동반되는 긴축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크루그먼 교수는 "유럽의 일부 정부가 무책임하게 행동했다는 측면이 있지만,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강력한 근거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일 통화체제를 유지해 나갈 수 있다는 유럽의 오만한 믿음이 근본적인 문제였다"고 비판했다.

 

이승선 기자, 기사입력 2010-02-18 오후 12:00:14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100218100430&section=02

cf. "유럽 재정위기, 월스트리트가 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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