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8일 화요일

사회주의, 새로운 시작 (박노자)

[박노자칼럼] 불멸의 단어 ‘사회주의’
 
올해 가을은 동유럽에서 분주했다. 베를린장벽 붕괴, ‘동유럽 해방’ 20돌인지라 기념행사들이 줄을 이었다. 이 행사에서 반영된 이데올로기는 그 이분법적 단순함으로는 거의 과거 스탈린주의를 방불케 할 정도였다. ‘현실 사회주의’는 ‘암흑’으로 서술되는 반면, 1989년 이후의 시절은 ‘자유와 번영’으로 이야기되곤 했다. ‘자유’에 대한 수사가 하도 절대적 어법이기에 리투아니아나 폴란드 등 ‘해방된’ 나라 중의 일부는 요즘 아예 적색 오각별 등 ‘공산주의적 상징물’을 엄금하기에 이르렀다. 망치와 낫이 그려진 옷을 입었다가 감옥행을 당해야 하는 사회라면 ‘해방’보다 차라리 조지 오웰의 <1984>를 떠올리지만, 무너진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동유럽 지배자들의 발악적 태도는 사실 저들의 깊은 불안감을 보여준다. 과잉차입과 무분별한 외국투자를 기반으로 한 지난 10년간의 동유럽의 ‘번영’이 얼마나 허구적이었는지 이번 세계공황이 그대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한때 스웨덴 자본의 가장 유망한 투자처로 보였던, 그러나 올해 국민총생산이 약 20%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라트비아는 계속 집단저항 행동으로 흔들린다. 지난 몇 년 동안 ‘고성장’으로 인구에 회자됐던 우크라이나의 경제는 이제 다시 2003년 수준으로 돌아갈 것으로 예상되며, 임금 체불과 감원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만이 확산된다. 정부가 ‘반공 투쟁’에 앞장서는 폴란드에서 경찰들마저도 시위에 나서는가 하면, 1980년대 말에 최초로 자본화에 나선 헝가리는 채무불이행의 위험이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유럽연합의 ‘내부 식민지’로서의 편입은 동유럽에다 ‘번영’이 아닌 종속성과 만성적인 사회불안을 가져다준 것이다. 이에 대한 불만은 흔히 극우적 배외주의의 형태를 띠기도 하지만, 최근에 세계적 자본의 위기를 목격하게 되는 상당수 동유럽 소장파 지식인과 노동운동가 등이 다시 한번 ‘사회주의’라는 화두를 들게 됐다. 오각별이나 망치와 낫 등이 젊은층 일각에서 유행하자 지배자들이 이를 엄금하는 전체주의적 입법에 나서는 것이다.

 

물론 서유럽의 조립공장이자 투자처, 또는 사창가로 전락한 동유럽에서 새로이 모색되는 사회주의는 스탈린주의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전위 정당’은 서로 동등한 일선 조직들의 횡적 네트워크로 대체되며, ‘무산계급’의 개념은 불안정 계층(젊은층·이민노동자 등) 등 여러 소수자들에 대한 고려로 대폭 확장됐다. 이제 추구하는 것은 ‘무산계급의 독재’라기보다는 일차적으로 주거와 육아, 교육, 의료 등이 시장영역이 아닌 공공영역이 되는 사회, 이윤이 아닌 다수의 복지를 목적으로 운영되는 민주적 복지사회다. 그러나 투쟁 방식 등이 아무리 달라져도 이들 동유럽 소장파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적색 오각별이 상징하는 1917년 10월혁명은 여전히 희망의 등불로 남아 있다. 20년 전 스탈린주의의 종말은, 결국 계급운동의 죽음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의미했다고 봐야 한다.

 

한국 재벌들의 휴대폰이나 자동차가 동유럽 시장을 석권한다 해도, 의료나 교육 비용 등을 고려하면 그 부품을 만들어주는 하도급 공장 비정규직들의 삶은 동유럽 노동자보다 더 고될 정도다. 서유럽으로의 이민 아니면 인생에 희망이 없는 동유럽 젊은이들이나, 한달의 ‘알바’로 겨우 50만원을 버는 한국의 가난한 젊은이들의 절망적인 상황은 크게 봐서는 매한가지다. 결국 국내에서도 급격히 팽창되는 소외층 사이에서 ‘새로운 사회주의’가 화두로 부상하는 것은 시간문제 아닌가 싶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기사등록 : 2009-12-07 오후 09:36, ⓒ 한겨레 

cf. http://signesdulevain.textcube.com/entry/사회주의-이념의-현실적-의미는-박노자-글에서

댓글 2개:

  1. 대체로 동감합니다만, 박노자 선생의 논조에서 굳이 "사회주의"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것은 아닌 것 같은데요. 그것이 "새로운 것"일 수 있다는 단서를 달긴 했지만 그게 꼭 "사회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 외피를 입은 채일 필요는 없고, 그럴 수도 없는 것이 현실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새로운 사회"에 대한 열망과 실천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지 (마치 동유럽인들이 "현실사회주의체제"의 종말을 원했던 것 처럼), 그것들이 "사회주의"의 부활이나 재활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는 것 아닐까요? 20세기 초 새로운 사회를 꿈꾸던 사회주의자들의 꿈과 이상을 향한 투쟁들과 견줄만한 "새로운 실천"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의미있지만 말입니다. 오히려 "민주주의"라는 것이 요즘은 더 화두가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이었는데요. 우리가 잃은 것은 "사회주의"였던 것도 아니고 "자본주의"가 궁극적으로 승리한 것도 아니라면 말이지요. 한겨레에서 대충 읽었다가 이곳에서 다시 보고 몇자 남깁니다. 박노자선생도 희망이 고프신 모양이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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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글쎄요, 제가 박노자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혹은 과대평가 한다면), 그가 이념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충분히 사회주의/공산주의인 것이 맞지만 그 구체적 실현 가능성에 대한 양보에 따른 차선의 선택이 민주적 복주국가 정도의 수준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박노자의 '새로운'이라는 표현 속에서도, 자본주의를 대체할 낡은 사회주의를 폐기하고 좀 다른 새로운 민주적 사회주의를 찾자는 것이라기 보다는 잃어버린(혹은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는) 사회주의 정신을 원래 그대로의 '불멸의 사회주의' 속에서 다시 찾자는 의미로 저는 독해 합니다. 민주주의의 진정한 실현이 사회주의적 이념의 지향에 기초하지 않고 어떻게 가능할 수가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저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에 방점을 찍은 것입니다. 뭐, 제 취향에 따른 내맘대로의 독해일 수도 있겠지만, 제가 그동안 읽어온 박노자 글의 행간 속에 숨은 함의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제가 파악한 함의가 박노자의 진의 밖에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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